2002년 9월 1일

일 년 후에 남은 것

by dropfairy

"너에게 아픔을 주는 사람은 안 될 거야. 믿어줘. 세상 누구보다 널 사랑해."


옛 기억이 떠오른다.


"세상에서 너를 가장 사랑한다는 자신감으로 절대로 널 놓지 않을 거야." 옛 남자는 이렇게 말했었다.


그리고 지금 내 곁에 있는 남자는 또 비슷한 말로 사랑을 맹세한다.






그가 떠난 뒤 몇 개월이 흐르고 이제 옛 남자에 대한 미련은 떠났다고 믿었다. 그런데 문득 추억을 그리워하는 날 느낀다. 오늘 밤 나는 유난히 소녀적인 감상에 젖어 있는 것 같다. 첫사랑의 기억이나 곱씹어가며 우울한 낭만에 빠져있다.


아직 시간이 채 흐르지 않았음을 안다. 내 사랑을 정말 떠나보내기엔 혼자서 아파한 시간이 그리 길지 않았다. 한 남자에 대한 사랑을 버리는 게 내 삶의 가장 힘든 일이 돼 버렸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시간이 더 지나면 자연스레 잊히겠지.


그를 정말 깊이 사랑했고 몹시 많이 미워했다. 그는 내가 어리다고 했었다. 난 그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난 정말 몰랐다. 나의 철없음이 그를 아프게 한다는 것을. 실연으로 한참을 울고 난 후에야 내가 뭘 잘못했는지 알았다. 성숙하고 따뜻한 여인으로 그를 감싸지 못했던 내 어린 날들.


그와 함께 있을 때는 그의 모습이 잘 그려지지 않았다. 그의 목소리 한 번 듣지 못하는 지금에서야 그의 모든 것이 너무나 선명하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세세한 모든 면들과 그가 좋아하는 것, 그의 언어, 그의 생활 습관 등 참 많은 것들을 내가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날 버린 그도 나에 대해 이렇게 많은 것을 기억할까? 나와 헤어진 후 그도 많이 아팠을까? 우리 이야기 같은 노래 가사에 아주 가끔이라도 날 떠올려 본 적은 없을까? 모두 부질없는 생각뿐이다.






그와 헤어진 후 주욱 내 곁을 맴돌았던 남자. 나는 이별을 했고 아직 그를 사랑하고 있고 그를 기억하고 싶다고 했다.


그가 내게 말했다. "네 상처 아물 때까지 옆에 있게만 해줘."


그를 '천사'라고 불렀다. 이후 4개월 동안 옛 남자 얘기만 했다.

그제야 '천사'가 말했다. "이제는 그 남자 얘기 그만 듣고 싶어."


어느덧 익숙해진 그에게 미안했고 그를 사랑해야겠다고 마음먹기도 했다.


그는 거의 모든 모임에 나를 데리고 갔다. 나를 볼 때마다 그의 눈빛에 사랑스러움과 자랑스러움이 느껴졌다. 세상 어느 누가 봐도 그가 나를 사랑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X 여자친구도 소개해주고 예전에 사귀었던 여자들 사진을 모두 내게 주었다. 멀리 사시는 할머니댁에도 데려갔고 할머니는 손주 여자친구를 처음 본다며 더없이 반겨주셨다.






나는 너에게 착한 여자가 아니었는데. 그저 제멋대로 교만하고 도도한 너를 마냥 쉽게 보는 그런 여자였는데.


영화에서건 어디에서건 난 너만큼 지독하게 사랑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어.


시간이 얼마가 흘렀건 내가 부르면 넌 언제든 내 앞에 있겠지.


내 평생 너는 내 편일 거구. 내가 밀치지 않으면 넌 다만 내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 가장 행복해하겠지.


나는 너를 '천사'라고 불렀어. 내 인생의 가장 고마운 사람.


하지만 널 사랑하지 않는다고 했어.


널 사랑하지는 않았어. 네가 날 사랑하는 것만큼이나 명확하게. 난 널 사랑하지 않았어.


그런데 네가 그립다.


네가 나를 잊을 수 없듯이 너도 나에게 하나의 유일한 사람이 되어 버렸나 봐.


너만큼 나를 사랑한 너만큼 대단한 너만큼 믿기지 않은 사람이 있을 것 같지 않아.


넌 왜 나를 사랑했니.


어린아이 같다고. 발랄한 소녀 같다고. 넌 그저 그런 말만 한 것 같은데.


넌 왜 나란 여자에게 중독되었니.


네 앞에서 끝없이 다른 남자 이야기만 하는 철없는 여자를 어리석게도 왜 네 인생의 전부로 품었니.


나는 너를 사랑하지 않는데 네가 그립다.


이런 내 마음이 어이없고 이기적이어서 오늘도 그저 참지만 네가 내 앞에 있다면 창피한 줄도 모르고 네게 기댈 것 같아.


간단한 숫자 몇 개를 누르면 넌 곧 내 앞에 있겠지만 너를 사랑하지 않으므로 내가 그 자신하던 지성과 이성으로 내 욕심을 누를 거야.


다만 당신에게 너무도 감사해.


당신 덕분에 내가 얼마나 가치 있는 여자인 줄 알았어.


술기운에 내가 또 몇 자 긁적인 것 같군.


깨고 나면 부질없을 글이지만 지금은 네가 그리워서 흩어질 기록을 남긴다.


고맙다.


미안하다.


보고 싶다.


내가 우습다.


정말 웃기다.


이런 바보 같은 짓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믿자.






헤어지고 일 년 후, 2002년 9월 1일 옛 남자에게 편지를 보냈다. 정확하게 말하면 헤어진 지 1년이 되는 날 그 사람에게 발송되도록 2001년의 마지막날에 적어서 예약해 놓았던 편지다.


내가 9월 1일이 정식으로 헤어진 날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그날이 그 사람을 되찾기 위해 혼자서 기차여행을 떠났던 날이고, 그 여행에서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낯선 땅에서 한 없이 울다가 차갑게 되돌아온 날이고, 그날 그 사람은 다른 여자와 함께 있었고 결국 그날이 그가 그 여자와 사귀는 날이 되었기 때문이다.





오늘은 그와 내가 사랑했던 2001년의 마지막 날이다. 난 오늘 이 독백문을 그에게 띄우고 싶다. 하지만 아직 때가 아니다. 그에 대한 나의 미련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지금은 그가 날 인정할 수 없을 것이다. 시간이 더 흐르고 그가 친구로서 나의 진심을 받아줄 수 있을 때 옛 기억의 회상물로써 이 글을 띄우리라. 그때쯤이면 우리는 예전에 말했던 대로 정말 친구로서 함께 할 수 있을 것이다.


참 여러 번 답장 없는 글을 그에게 보냈다. 하지만 오랜만에 보내는 이 글만큼은 답장을 받고 싶다. 그와 내가 타인으로 살아간 일 년의 시간 동안 서로의 곁에는 새로운 사랑이 생겼을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이제 우리는 혼란스러운 감정을 가진 옛 연인이 아니라 서로를 잘 아는 친구일 뿐이다.


언제부턴가 그는 내 부탁을 단 한 가지도 들어주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가 더 이상 사랑 또는 미련이라는 끈으로 묶여있지 않는 그때에는 들어줄 수도 있겠지. 그때쯤이면 그가 날 다시 믿을 수도 있을 테니까.


시계의 초침을 그때로 맞춰놓고 이제 내 첫사랑의 기억을 떠나보내련다.

내 존재의 모든 것을 아프게 했던 내 사랑아.

나의 스물 두해. 그리고 2001년 모두 잘 가거라.


텅 빈 마음으로 모두를 보내니 부디 다시는 후회하지 않기를.

흐릿한 안개빛으로 멀어져 가는 2001년의 끝에서 당신의 옛 친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