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가을 앞에서

나를 떠나 행복하길

by dropfairy

"넌 무슨 동물이니? 난 여우야. 넌 세상의 수많은 소년일 뿐이야. 넌 나에게 아무것도 아니지. 하지만 네가 날 길들이면 모든 게 달라질 거야. 난 멀리서 밀밭만 봐도 가슴이 설렐 거야. 네 머리색과 같은 금빛이 널 떠올리게 할 테니까. 네가 날 길들이려면 우선 끈기를 가지고 조금 떨어져서 가만히 날 지켜봐야 해. 그러다 점점 가까이 앉게 될 거고 우리는 길들여질 거야."

"너희는 세상의 수많은 장미꽃일 뿐이야. 하지만 내 별의 장미는 너희들과는 달라. 난 그 꽃에게 물을 주고 바람막이를 해 주고 심술과 짜증도 들어주었거든. 그 꽃은 나를 길들였고 나에게 유일한 하나가 됐어."






사랑하는 사람이 나에게 장미 한 송이를 건네면 그 꽃은 너무나 특별한 게 될 거야. 난 그 꽃이 소중해서 몇 번이고 바라보고 향기를 맡고 시들 때쯤이면 두꺼운 책 안에 조심히 놓아 곱게 말리겠지. 그리고 언제쯤 그가 못 견디게 그리우면 하얀 편지지에 빨갛게 마른 꽃잎을 끼워 그 사람에게 보낼 거야. 나에게 특별했던 그 꽃은 나를 사랑하는 그 사람에게도 특별해질 거야.


내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었다. 내 꿈, 바람, 욕심, 습관, 생활, 친구, 심지어 가족까지도. 그런데도 우리는 헤어졌다.



너와 헤어져서 살 수 있다고 믿었지. 믿으려고 했어. 하지만 못 견디게 따가운 아픔들. 한 달을 그렇게 아프고 나니 한 가지 달라지는 게 있더군. 너와 헤어질 수 없다는 생각. 널 싫어하시는 우리 부모님을 설득시킬 수 있다는 자신감. 그게 생겼어.


그래서 할 말이 있다고 너에게 전화를 했어. 너에게 줄 장미꽃도 준비했고 너에게 들려줄 이야기와 너에게 보여줄 나의 진실함도 한데 모았지. 하지만 넌 아무 말도 들어주지 않았고 그대로 자리를 떠나버렸어. 널 붙잡으려고 널 붙잡아서 못한 말들을 해야 한다고, 내내 고민했던 내 맘들을 보여줘야 한다고 그래서 널 쫓아나갔고 너에게 부탁을 했어. 내 말을 다 들어줄 시간만큼만 나와 있어 달라고.


넌 날 피해 정신없이 도망갔어. 그런 너를 보며 넌 날 사랑하지도 않았고 날 기만했다고 증오했어. 너 역시 머릿속에서 가장 사악한 사람으로 날 꾸며갔어. 날 사랑한 적도 없었고 날 만난 걸 후회하고 있고 난 무조건 나쁜 사람이라고 넌 아무렇게나 말했어.






한 달 전 나의 마지막 말이 너를 왜 떠나게 했는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어.


"많이 힘들겠지만 당신과 함께 갈게요."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당신이 너무 좋으니 평생 당신 곁에 있겠다는 고백이 왜 이별의 단초가 되어야 하는지 수 백번 생각해도 알 수 없었어.


"너 때문에 내 모든 정체성이 흔들렸어."라고 너는 말했지. 나의 모든 걸 버리면서 널 선택한다면 내가 많이 불행해질 수 있다는 걸 알아. 그래도 널 사랑하기에 어떤 고통도 그대로 받아내고 싶었어.


그게 너를 처음에 사랑하기로 결심했던 내 용기였고 내 사랑을 지금껏 이어온 힘이었어. 너무 아프다고 피해가지는 않겠다. 내 사랑, 내 선택에 대해 끝까지 책임지겠다.


평생 네 옆에 있겠다는 말로써 너를 다 감쌀 수 있다고 믿었어. 내 옆에서 작아지고 상처가 키워지는 너를 몰랐어. 헤어지지 않는다면 다 극복될 줄 알았어.






사람은 상대방이 나에게 잘해준 것만큼 그 사람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 내가 상대방에게 잘해준 것만큼 그 사람을 좋아한다고 하지. 맞는 말이야. 넌 나에게 너무 헌신적이었고 날 감동시켰고 하지만 그때 정작 정말 행복해했던 사람은 너였어. 시간이 흘러 너보다 더 헌신적인 내가 된 후에야 난 그 말을 진심으로 이해했어. 사랑하는 것이 사랑받는 것보다 행복하다는 말도.


오늘 너와 관련된 모든 것을 지웠어.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건 어느 것 하나도 남겨두지 않았어. 너의 참기 힘든 냉대 때문에 헤어지는 게 아니야. 숨 막히게 몰아붙이는 매정함과 잔인하게 말하는 너의 폭력 때문에 떠나는 건 정말 아니야. 다만 이제 정말 떠나는 건 내가 길을 잘못 들어섰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야.


살다 보면 마땅하지 않은 길을 걸어갈 때도 있지. 때로는 그 길이 너무 큰 마력을 지녀서 내가 못 벗어나도록 발목을 단단히 쥘지도 몰라. 벗어날 때는 발목이 부르트고 온몸이 녹초가 되고 정신도 황폐해질 거야. 마침내 그 길을 벗어나서 알맞은 길로 돌아서면 상처도 아물고 정신도 생기를 되찾겠지.


난 이제 비로소 알았어. 잘못 들어선 길, 내 인생에서 처음 맞이하는 엄청난 유혹의 길, 하지만 반드시 벗어나야 할 길. 그 길이 너임을 이제는 알았어.


나의 모든 선택은 나에게 하나같이 많은 책임과 의무를 요구해. 널 선택한 일은 어떤 것보다도 강한 책임과 의무감이 되어 날 짓눌렀어. 그래서 널 놓지 못했다.


하지만 실수를 인정하는 건 그와 별개로 중요하다는 걸 이제 인정하려고 해. 선택의 실수, 너무나 명백한 실수임에도 단지 내가 선택했다는 이유만으로 끝까지 밀어붙인다면 그건 분명히 어리석은 일일 테니까.


널 사랑한 것 자체를 실수라고는 말하지 않을게. 하지만 너와 헤어져야 할 때 헤어지지 못한 건 내 실수였어. 내 결벽성이 지나치게 작용한 어리석은 행동이었고 난 그 일만큼은 후회해야 할 것 같아. 좀 늦었지만 이제는 내 실수를 받아들일게.


네가 그렇게 바라던 일, 이제 해 줄 수 있을 것 같다. 다들 헤어질 때는 '행복해'식의 말을 하지. 난 너에게 마지막으로 무슨 말을 할까.


날 길들였던 Y야. 그 기억 고맙게 간직할게. 먼지가 자욱이 앉은 먼 훗날 한 번쯤은 되돌아볼지도 모르잖아.


날 많이 사랑해 준 거, 그리고 널 많이 사랑할 수 있도록 내 옆에 있어준 거 모두 정말 감사해. 널 미워하지도 원망하지도 않고 많이 사랑했던 네 모습 그대로 보낼게. 잘 가. 내가 없는 곳으로.

네가 많이 힘들어하는 2001년 가을 앞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