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념하다 애써 웃다
'존재'. 뭔지 모를 나의 '존재'가 너무 소중해서 그 안으로 천착해가는데 내 스무 해가 다 갔습니다.
스무 해가 지나고 또 두 해가 지나서야 사랑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관계'가 무엇인지도.
사랑했던 사람. 미치도록 그리웠던 사람을 다시 만나는 건 어떤 기분일까요? 우연이라도 마주치게 된다면.
저에게는 아직 그런 기회가 없네요. 되돌릴 수 없는 사랑인데 우리가 연인으로 함께 할 날은 이 세상에 단 하루도 없을 텐데. 더 이상 사랑의 기억을 이어갈 수 없는데. 아무것도 아니겠죠.
그렇게 고집스럽게 그렇게 기다렸고 그렇게 한 사람을 만났고 그렇게 내 모든 걸 다 주었고 그렇게 내 모든 걸 다 버리려 했고 고통과 눈물과 추억이 남고 조금씩 다 희미해지고.
모두가 힘든 사랑이라고 그렇게 아픈 사랑 그만 버리라고. 정말 모두가 그렇게 말했지만 난 그 사랑 지킬 수 있었는데. 평생 함께 할 수 있었는데.
스물 두 해 동안 단 한 남자에게 마음을 주었죠. 단 한 남자에게 약속을 했고 내 일상을 허락했고, 내 소중한 이들에게 행복한 가슴으로 그를 이야기했죠.
그와 헤어진 지, 헤어진 후 연락한 번 안 한지 3개월이 조금 넘었네요. 미련 때문에 미칠 것 같았는데 이제 미련은 떠나고 내 유년의 동화 같은 아름다운 추억이 하나 남았어요.
사랑과 관련된 모든 것을 접할 때마다 눈물이 났죠. 눈물도 습관이라 너무 바보 같은 습관이 들어버린 건지, 약한 게 너무 싫어서 애써 누르는데도 어쩐지 눈물이 흘렀죠. 이제 눈물도 그치고 솔직히 아직 가끔씩 고였다가 사라지기도 하지만 이제 내 사랑은 정말 떠났습니다.
이렇게 체념했다가
때로 잊기 위해 떠나고
때로 얻기 위해 머물고
결국 왔던 길을 돼 밟아야 하는 것.
여행은 과거나 미래로 떠나는 길이라고 하던데. 어떤 이는 과거를 회상하고 벗어나기 위해 어떤 이는 오늘을 쉬어가며 미래를 꿈꾸기 위해 떠나죠.
내가 떠난 이유? 호기심? 낯선 것에 대한 동경?
그래요. 여행을 통해 치유해야 할 정도의 상처가 이제는 없으니까요.
한 때는 막막하기만 했는데 시간이라는 거, 참 고맙네요.
어느 순간 가끔씩 되살아나던 아픔이 희미해지더군요. 그리고 이젠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돼 버렸어요.
여행을 가고 이렇게도 생각해 봤다가
무작정 세상 어딘가에 변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 믿지만
그 사람이 당신일 거라고 그리 단정 짓기 겁나졌어.
당신이 내 맘을 한치도 놓지 않다 어느 날 힘이 부쳐
반 오리만 손을 떼어도 나는 이미 불안해졌어.
나 병에 걸렸나 봐. '후천적 믿음 결핍증'
믿고 사랑하는 게 고통으로 남아 울면서 일어선
내 지난날이 악몽처럼 똑같이 그려질까 봐
나 겁쟁이가 돼 버렸어.
사랑하기 전에 난 겁쟁이었죠. 상처받을까 막연히 두려워했죠. 그러다 사랑을 했고 내가 사랑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유일한 순간이었던 것 같네요.
사랑이 지나간 지금 또 겁쟁이가 돼 버렸어요. 사랑을, 남자를 믿지 못하는 날 보게 되고 그런 나에게 자조적으로 아직 상처가 다 아물지 않았구나 이렇게 되뇌곤 한답니다.
하지만 진짜 이유는 지금 내가 사랑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어요.
막연히 기대도 해 보고
"삭제하시겠습니까?"
"네."
한 순간 선택으로 무척이나 소중했던 흔적들을 지워버린 적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보냈던 숱한 편지들. 한 때는 날 행복하게 했었는데 결국엔 잊기 위해 일부러 지워버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끔 아쉽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사랑의 흔적은 사라졌어도 순수한 날의 아름다운 이야기들은 남아있으니. 그리고 이젠 비워진 편지함에 새로운 편지들이 쌓이고 새로운 추억들이 생겨나고 있답니다.
오늘 날씨가 참 좋았죠? 전 아침부터 안 좋은 일이 있어서 조금 우울했는데 청명한 하늘과 가벼운 하늬바람이 마음을 넉넉하게 해 주는 것 같더군요. 이제는 웃을 수 있을 것 같아요.
가을을 유난히 좋아하는 편이라서 올해만큼은 가을이 빨리 지나가버렸으면 했어요. 혼자서 행복할 자신이 없었나 봐요.
음. 하지만 막상 가을이고 보니 좋긴 좋네요. 산에 가서 예쁜 단풍도 말리고 참 좋은 친구한테 편지와 함께 단풍을 띄울 수도 있고. 그리고 가을엔 낙엽 타는 냄새도 있고. 또 이번 가을에 좋은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잖아요.
이렇게 애써 웃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