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혼잡했던 태국 후아힌 마켓 빌리지 푸드코트. 언니가 주문한 코코넛 커피를 가지러 가는 동안 나는 자리를 겨우 잡고 앉았다. 그 사이 태국 여인의 일행인지 키 큰 갈색 머리 서양인 한 명이 까맣고 긴 머리의 태국 여인의 앞자리에 앉았다. (지금부터 표현하기 쉽게 그를 케빈이라 부르고, 태국 여인은 단아하고 우아했던 보석을 뜻하는 플러이로 부르기도 하자.)
때마침 코코넛 커피를 들고 온 보리 언니를 향해 케빈은 손을 뻗으며 커피를 받는 시늉을 했다.
"Oh, thank you."
언니는 상황을 모르고 순간 당황했지만 농담을 알아채고 우리 넷은 동시에 유쾌하게 웃었다.
서로 다른 나라에서 온 이방인들이 태국의 어느 식당가에서 함께 앉은 인연으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게 되었다. 밝은 기운을 가진 케빈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내내 우리를 웃게 만들었다. 농담하는 것도 좋아해서 순간 당황하기도 했지만 가벼운 농담으로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졌다. 복잡하고 시끌시끌한 식당 안에서 이야기를 나누면서 하나의 돔처럼 우리 테이블에 막이 쳐진 듯 서로에게 집중하며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Kevin과 플러이. 그들과 함께 이야기는 인터뷰로 소개하기로 하자.
빛방울: 여행 중인가요?
케 빈: 6개월 동안은 캠퍼를 타고 유럽 등지를 다니다가 캐나다에서도 지냈고, 현재 태국에서 2개월째 머무는 중이에요. 앞으로 한 달 더 있을 계획이에요.
빛방울 : 케빈, 당신의 삶이 너무 부러워요. 그렇게 오랫동안 외국에서 머물며 인생을 즐기며 살아가는 것이 너무 근사해요.
케 빈 : 아니요, 다른 사람의 삶을 부러워하지 말아요. 그럴 필요 없어요. 각자의 삶이 있을 뿐이에요. 나는 이렇게 여행을 다니기 전까지 계속, 일, 일, 일, 그리고 또 일, 일, 일만 하면서 하루도 편히쉬지 못한 채 일만 하며 살았어요. 나는 이제야 쉴 수 있게 되었으니 나는 즐길자격이 생긴 것 뿐이에요.
빛방울 : 그랬군요. 언제 지금 굉장히 동안인데 혹시 실례지만 나이를 물어도 될까요? 언제 은퇴하신 건가요?
케 빈 : 나는 지금 58살이고, 51살에 은퇴했어요. 한창 코로나 때 응급환자를 헬기로 이송하는 일을 했어요. 몇 년 동안 제대로 누워서 잠을 잔 적이 없어요. 언제 발생할지 모르는 응급환자를 위해 대기하고 있다가 call이 오면 즉시 출동해야 했어요.
(플러이는 그 상황을 깊이 공감하는 듯, 정말 힘들었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이미 그의 이야기를 알고 있을 것이었다.)
빛방울 : 그 당시 중요한 일을 했네요. 오랫동안 위급환자를 이송하는 일을 하셨으니 힘드셨을 것 같아요.
케 빈 : 열심히 일했고, 쉴 수도 없었어요. 물론 돈도 많이 벌었어요. 집도 엄청 넓었고, 방마다 큰 침대도 몇 개씩 있았죠.값비싼 차에 비싼 보트, 옷도 많았죠. 하지만 행복하지 않았어요. 어때요? 살면서 침대가 몇 개 필요한가요?
빛방울 : 한 개면 족하지요.
케 빈 : 맞아요. 그 당시 나는 잘 나가는 여자 친구가 있었고 집도 궁궐처럼 넓었어요. 방도 많았고 침대도 많았어요. 하지만 아무리 비싼 음식을 먹어도 만족스럽지 못했어요. 지금은 이렇게 밥에 계란만 얹은 밥을 먹어도 플러이랑 있으면 그때랑 비교할 수 없이 행복해요.
(케빈은 태국 음식이 너무 달고, 짜서 메뉴에서 소스나 양념을 빼고 스팀 라이스에 계란만 얹어달라 주문하여 먹었다고 했다. 가끔 의사소통이 되지 않으면 주는 대로 먹기도 하고 말이다.)
케빈과 플러이는 이야기를 하면서도 틈틈이 눈을 마주 보며 함께 행복한 웃음을 지었다. 케빈이 퇴직 후, 이곳에 왔을 때 만난 인연이라고 했다.
케 빈 : 플러이는 캐나다에서 살 때 여자친구처럼 부자도 아니고,화려한직업을 가지지도 않았어요. 하지만 그녀랑 있으면 그저 마음이 편안하고 행복해요.
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팔에 새겨진 타투를 보여주었다.
Keep it simple.
지금을 즐기며 행복하라는 메시지로 받아들여졌다. 삶은 복잡한 가운데 있지 않다. 삶은 단순함 속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다고 케빈은 내게 말하는 것 같았다. 중간중간 알아듣지 못하는 말들이 무수히 많아서 그대로 옮길 수 없었지만 단어 뜻을 묻기 위해 대화의 맥을 끊을 수는 없었다. 귀 기울여 듣지 않아도 영어가 귀에 쏙쏙 잘 들어오면 얼마나 좋을고!
빛방울 : 케빈, 당신의 타투가 정말 맘에 들어요. 사진 찍어도 될까요?
케빈은 기꺼이 그의 팔뚝을 사진을 향해 멋진 포즈를 취해 주었다. 그의 타투는 지금의 그의 삶을 잘 말해주는 듯했다. 대궐 같은 화려한 집을 떠나 캠핑카에 몸을 싣고 여행을 다니는 그의 삶. 옷 한 벌, 작은 침대 하나, 신발 한 켤레를 신고 간단하게 여행을 떠나는 그의 삶. 그의 옆에는 사랑하는 태국 여인이 함께.
반대로 그는 내게 물었다.
케 빈 : 태국엔 누구와 온 거예요? 보리와 둘이 온 거예요?
빛방울 : 엄마랑, 남편, 아이들, 그리고 지금 여기 있는 보리 언니랑 그녀의 딸 사이다와 같이 왔어요.
케 빈 : 멋지네요.나에게도 아이들이 있어요.
빛방울 : 아이들은 두고 이렇게 여행을 다니는 건가요?
케 빈 : 아이들은 이미 많이 컸고, 그들은 각자의 삶을 찾아 날아갔어요.
(그 아이들은 태국에서 만난 여인과의 아이들은 아닌 듯 하였다. 원래 부인 이야기도. 너무 사적인 질문이 될 듯하여 자세히 묻지 못하고 그저 짐작만.)
케 빈 : I just tell you something. 아이들을 사랑하지요?
빛방울 : 네, 당연하죠. 자식이니까요.
케 빈 : 요즘엔 부모들이 아이를 사랑한답시고 둥지에 아이들을 두고 날지 못하게 하는 것 같아요. 뭐든지 가져다주고, 무엇이든 대신해주면서 아이들을 사랑하는 건 그게 아니에요. 그건 흡사 아이들의 날개를 자르는 것과 같아요.
아이들이 멀리 날아가게 하려면 아이들을 둥지 밖으로 보내야 한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먹이를 손에 들려주고, 힘든 일을 대신해준다면 아이들은 평생 혼자의 힘으로 날아갈 수 없다. 날 수 있다 하더라도 날개를 활짝 펴지 못한 채 둥지 근처를 맴돌 수 밖에 없다. 혼자 연습하지 못했으니 날아가는 힘이 부족할 테고 날아간 들 두려움으로 새로운 곳으로 훨훨 날아가지 못할 것이다.
작은 벌이 되길 바라는가, 큰 날갯짓을 할 수 있는 새가 되길 바라는가. 그것은 부모가 어떻게 키우는가에 달렸다. 물론 아이들의 타고난 기질과 기량도 무시할 수 없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떠한가. 내 둥지에 아이들을 두고 날갯짓하려는 아이를 단도리하고 있는 건 아닐까. 사실 점점 나도 모르게 아이들을 그렇게 키우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푸드 코트에 사람들이 몇 번 바뀌는 사이.
나는 보리 언니가 2층에서 사야 할 물건을 사러 간 사이. 신기하게도 어디서 왔니? 어디 다녀왔니? 음식은 어떠니? 등등의 단순한 질문이 아닌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던 시간이 마음을 들뜨게 했다.
빛방울 : 너무 오랫동안 두 분의 오붓한 시간을 뺏은 건 아닌가요?
플러이 : 그런 말 하지 말아요. 여행하면서 다른 문화를 가진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정말 멋진 일이에요.
빛방울 : 저도 그랬어요. 두 분과 이야기 하는 동안 너무 즐거웠어요. 인생에서 소중한 깨달음을 여기서 얻게 될 줄은 몰랐어요. 정말 의미 있는 시간이었어요.
케 빈 : 이곳에서 가족들과 멋진 시간이 되길 바라요.
빛방울 : Keep it simple! 잊지 않을게요. 두 분도 이곳에서 행복한 시간 되시길 바랄게요. 소중했던 순간을 기억하고 싶은데 사진 같이 찍어도 될까요?
케빈, 플러이 : 물론이죠! 같이 사진을 찍는 건 우리 기쁨이에요.
찰칵! 우리는 한껏 만남의 시간을 소중히 여기며 한 장의 사진으로 추억을 담았다. 해외여행에서 얻는 또 하나의 즐거움은 낯선 공간에서의 다른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다. 나와 다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과의 만남은 또 다른 세계에 초대받는 것.
사람들이 계속 지나다니고 주문 소리가 띵동 거리고, 음식 트레이를 들고 다니는 복잡한 푸드 코트 안에서 이런 대화를 하게 될 줄은 몰랐다. 언어는 달랐지만 세상 한 복판에서 인생 선배를 만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케 빈: 내가 한 말을 기억하세요.아이들에게 목메지 말고 당신에 삶을 즐겨요. 자녀들의 날개를 가위로 자르듯 싹둑싹둑 자르지 말아요. 그들이 스스로 날 수 있게 기회를 줘요.
빛방울! 당신도 진정 원하는 것을 하며 행복하길 바라요.
그는 헤어지며 내게 당부했다.
아차차. 인사를 나누며 헤어지고 난 후, 이메일이라도 알아둘 걸. 라인이라도 미리 깔아둘 걸. 가끔 자유로운 그에게 편지를 보낼 수도 있었을 텐데. 나와 찍은 사진을 메일로 보내줄 수도 있었을 텐데...
그들은 그들이머무는 리조트 이름을 알려주며 놀러오라고 했다. 가족과 함께 있어서 인사치레로 듣고 헤어졌지만, 짧은 만남이 긴 여운이 되어 남는다.
케빈&플러이!
다음번 태국 여행 중, 어느 카페에 들렀다가 우연히 당신들을 만나는 상상을 합니다. 여행하며 만난 멋진 그대들은 내 인생 한컷으로 소중히 남겨봅니다.
À bientôt. 또 만나요!
Keep it simlpe. 단순한 삶은 곧 인생의 본질에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복잡한 가운데 훌쩍 비행기 티켓 끊어 가족과 이곳으로 날아온 나를 셀프 칭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