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따뜻해져서 걷기가 좋다. 봄이 왔나보다. 저녁을 먹고 나니, 봄이가 배드민턴을 치러 나가자고 조른다. 나른한 봄기운에퇴근 눕고만 싶었지만 딸이 나가자는 제안에 몸을 일으킨다. 남편과 봄이가 배드민턴을 하는 사이 트랙을 한 바퀴 돌아본다.
"옳지, 아빠한테 힘껏 차 봐!"
"아빠 나 잘하죠?"
아이는 짧은 다리로 한 다리만 올려 차도 넘어질 것만 같은데 아빠, 엄마, 누나의 칭찬에 한껏 달뜬 표정이다.
날씨가 좋아진 모양이다. 따뜻해지지 저녁에도 체육공원이 북적거린다. 축구 교실 수업에서 열심히 뛰는 아이들, 트랙을 도는 사람들, 엄마, 아빠 손잡고 나온 동네 꼬마 아이들, 친구들끼리 족구 하는 중학생들. 구역구역마다 사람들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가족끼리 어울리는 모습, 밖에서 발개진 얼굴을 한 아이들 모습, 여전히 쌀쌀한 저녁 바람에도 더운듯 등에 땀이 흠뻑 젖은 모습으로 축구하는 학생들 모습. 바라보는 것만으로 엄마 미소가 지어진다.
결혼했을 때는 임신한 사람들이 눈에 보였다.
'나도 저렇게 엄마가 되겠구나.'
아이를 가졌을 때에는 유모차를 끌고 다니는 또래 엄마들이 유난히도 눈에 띄었다. 지나가는 아가들을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었던 것 같다. 손을 흔들어주고, 아이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이기도 했다. 아이들이 키우면서 아이들 크는 모습과 닮은 그림들이 눈에 쏙쏙 들어오곤 했다. 흑백에 칼라를 입히듯.
(*컬러베스효과: 한 가지 색깔에 집중하면 그 색 물건만 눈에 들어온다.)
아이들이 어느 정도 크고 나니, 지금의 모습이 찾아지지 않았다. 저만치 지나온 길을 바라보는 나를 발견했다. 아이들하고 나도 저렇게 놀았었는데 운동장에서 가족들과 공차는 모습을 보며 그날을 떠올렸다. 잔디밭에서 남편과 아들이 축구공 차면서 슬라이딩하고 까르르 웃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거리에서, 운동장에서, 놀이터에서 그렇게 가족들이 다 같이 나와서 시간을 보냈던 그날의 기억을 자꾸 떠올렸다. 나이가 들면서 돌아볼 과거가 많은지 자꾸만 지나온 시간을 꺼내보게 된다.
어린 시절엔 다가올 미래를 상상하며 희망을 품고 살다가 지금을 흘러 보내는 아쉬운 마음을 담아 내 시선은 자꾸만 뒤로 걸어가고 있다. 갖고 싶은 감정이 거기에 들어있는 건 아닐까? 기억으로만 같은 곳에 머물러보지만 지금은 가질 수 없는 것들. 같은 곳에 서 있어도 이젠 더 이상 같은 자리가 아님을 실감한다.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
헤라클레이토스의 말처럼 한 번뿐이기에 다시 돌아갈 수 없기에 더한 그리움처럼. 그리하여 지금도 과거가 되고 그만큼 소중한 순간으로 남아있는 거겠지. 과거가 아닌 지금,
그리고 미래로 향하자. 과거가 될 지금의 순간을 붙잡고 찰나에 내 온 마음을 담아 살아가자. 후회로 돌아보지 말고 과거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받아들이고, 그땐 그랬지 하면서 그때의 행복을 만끽하며 말이다.
얼마 전 친구를 만나기 전에 도서관에서 기다리다가 하얗게 짧은 머리를 하신 연세 지긋하신 분이 책 두 권을 손에 들고 나오시는 모습이 너무 아름다웠다. 나이 들어도 저렇게 나이 들어가야지 하면 내 미래의 모습을 살상했더랬다. 뒤가 아닌 앞을 향해 바라보도록 내 시선을 옮겨주셨다. 더 먼 미래엔 내 아이의 손주를 무릎에 앉히고 책을 읽어주는 할머니 모습을 그려낸다. 빛이 드는 창가에 앉아 커피 한잔 시켜 놓고 글을 쓰는 할머니도, 할머니가 되기 전에 작가로서 누군가에게 강연도 하고 북토크를 하는 모습을 펼쳐본다.
내 시선을 보면 지금의 내 모습을 알 수 있다. 한 동안 그곳에 머무르고 있었나보다. 자꾸만 뒷걸음질치며 '너는 왜 그러고 있냐?'라고 나무라기도 하고 '돌아가고 싶다.' 그리운 마음을 안고 살았다. '그때 좋았는데...' 하며 지금의 행복과 저울질하기도 했다. 가끔은 돌아보며 다시 나를 다지며, 새로운 에너지를 끌어올리기도 하지만 웅덩이에 빠져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