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에 명절마다 시골 큰아버지 댁으로 길을 나섰다. 양복 차림을 하고 아버지는 서울에서 산 선물보따리를 양 어깨에 메고 들고, 엄마는 집에서 손수 만든 음식 보따리를 들고 시외버스에 올랐던 기억이 난다. 도착하면 제일 먼저 할머니가 계신 방에서 큰절을 하고 나면, 아버지가 들고 오셨던 보자기를 펼치셨다. 보자기에서 꺼내서 드렸던 것 중에 자주 등장했던 간식이 밤양갱이었다. 이가 없는 할머니에게 맞춤형 간식이 아니었을까? 시골에도 밤양갱을 팔지만 할머니가 직접 사드실 리 만무하고, 게다가 하나 사려면 '전빵'까지 한참을 걸어가셔야 한다.
(*전빵 : 가게의 사투리로 작은 동네 가게를 뜻한다.)
할머니는 받으시자마자 누런 상자를 열고 금빛깔 나는 속껍질을 밤 까듯 소중하게 벗겨서 깨물어 드셨다. 옆에서 얻어먹기도 했던 부드럽고 달콤한 기억 한 양갱.
요즘 비비의 노래로 떠오른 밤양갱. 아마도 아이들은 밤양갱이 뭔지도 모른 채 노래로 먼저 접하지 않았을까? '달디달고 달디달고 달디단 밤양갱이 도대체 뭐지?' 생각하면서 노래를 흥얼거렸을 것이다.
시후와 다영이. 두 아이는 교실에서 친구지만 이종사촌 사이이기도 하다. 남매처럼 교실에서 챙겨주기도 하고 티격태격하기도 하는 사이.
청소를 막 끝내고 책상에 앉아있는데, 두 아이가 내게 다가온다.
"선생님, 밤양갱 먹어보셨어요?"
"그럼! 먹어봤지."
요즘 뜨는 가수의 노래, 아이들부터 AI까지 여러 가수의 버전으로 '밤양갱'이 판을 친다. 처음 들으면서 너무 신선했고 마음에 와닿아 어떤 생각에 머물며 나를 울리기도 했던 노래. 아이들이 궁금해할 만하다.
"제가요, 오늘 드디어 편의점에서 700원을 주고 밤양갱을 샀거덩요."
"그래?"
"네, 제가 진짜 먹고 싶었어요. 근데 밤양갱이 노래랑 달라요."
"어떻게 다른데?"
"노래에서는 달디달고 달디단 밤양갱이어서 진짜 맛있는 줄 알았거든요. 근데 속았어요."
"하하하"
"거봐! 정시후, 내가 그거 말고 젤리 사먹자고 했잖아. 700원이나 주고 샀는데, 진짜!"
옆에 있던 다영이도 입맛에 안 맞았는지 시후 말만 듣고 사 먹었다가 돈만 버렸다는 듯 투덜댔다.
"너희들에게 입맛에 안맞을지도 모르겠다. 어른들이 좋아하는 맛일 거야."
아이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것 같았다. 달디달고 달디단 다른 것들이 너무 많은 세상이니까. 초콜릿, 사탕, 과자, 달디단 음료들이 가득찬 세상에서 그 달콤함을 다 맛본 아이들에게 밤양갱은 매력적인 단맛은 아닐 것이다. 오늘은 시후와 다영이가 드디어 밤양갱의 정체를 알게 된 날이다.
아이들에게 달디단 맛은 초콜릿만큼 진하고 마시멜로처럼 달콤하게 사르르 녹는 맛일 테지. 밤양갱은 그에 비해 달긴 하지만 쌀엿처럼 토속적인 달큰함이라고 할까나.
아이들은 하나씩 밤양갱 상자를 열고, 황금빛 포장지를 열 때만 해도 맛을 상상하며 기대에 부풀었을 것이다. 하지만 생각과 다른 순간, 동공에 지진이 일어나고 상대가 명확하지 않지만 배신감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다시 사나 봐라.'
어릴 적 먹었던 밤양갱의 추억을 떠올린 건 시후와 다영이 덕분이었다. 솔직하게 밤양갱의 소감을 전해준 아이들이 얼마나 귀여웠는지 모른다. 누구에게나 맛있을 수는 없지. 그 어떤 것도 마찬가지고. 각자 좋아하는 것이 다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