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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방울 Oct 04. 2024

(프롤로그) 사랑하는 당신에게

아버지의 뜬금 고백

엄마가 보내온 아빠의 편지글.

"방울아, 아빠가 엄마한테 보내오신 글 좀 봐. 작년에 쓰신 글인데, 다시 보내오셨네."


아버지는 시간이 될 때면 집에 있는 이면지에 글을 쓰셨다. 어느 날엔 흥얼거리며 노래가사를 적었고, 어느 날엔 신세한탄, 어느 날엔 정치판을 보며 풍자를 한가득 써내려 가셨다. 오늘 글처럼 엄마를 향한 세레나데를.(아빠가 보내오는 구구절절한 사랑 이야기에 엄마는 말만 이렇게 번지르르하지 말고 글처럼 실천을 좀 하시라고 잔소리를 덧붙이시지만) 그렇게 차곡히 모인 종이들로 만들면 책으로  될지 모르겠다. 어느 날엔가  너덜해진 종이 뭉치를 버리기도 하셨는데, 남아있던 글뭉치를 한 번씩 꺼내어 다시 고쳐쓰기도 하시고 카톡으로 오늘처럼 옮겨서 엄마에게 보내시곤 하셨다.


브런치 작가인 딸이 보기에도 아빠의 글은 가끔 눈물이 되고, 웃음이 되었다. 아빠에게 허락받고 아빠의 글이 쓰인 종이 뭉치를 모아서 가져왔다. 언제고 아빠의 책을 만들어 드리겠다고 다짐하고 왔는데 어쩌다 보니 이러구러 1년이 다 되어간다. 브런치에라도 올려서 연재글로 쌓이면 하나의 브런치 북으로 묶어서 책으로 엮어보면 어떨까 싶었다. 갑작스런 엄마의 카톡 글을 시작으로 아버지의 글을 연재하기로 했다.


당신의 딸이 어떤 마음으로 가져왔는지 아버지는 모르시겠지. 당신이 살아온 세월에 비해 짧은 시간 동안 바라본 딸의 눈만으로도 알게 되었다.  그 간의 세찬 바람, 사나운 파도, 거친 들판을 걸어오셨기에 지금의 당신이 여기에 존재한다는 것을. 아버지의 글들이 다시 버려질까 봐 겁이 났다. 그냥 사라져 버리기 전에 아버지의 기록을 곱다랗게 엮어서 드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에겐 그저 스치고 지나갈 글들이 될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나에게 소중하다는 것을 아버지에게 알려드리고 싶다. 당신이 내게 그토록 소중한 아버지라는 것을...


쓰인 순서와 상관없이, 주제에 상관없이 내 손길에 닿은 아버지의 글을 실어보려고 한다.



#아버지의 편지(1)

사랑하는 영희에게


세월이 정말 급하게 흘러갔소. 내 나이 팔십을 살 줄은 상상도 못 했소. 날 때부터 주변에서 부실하게 태어나 인간이 안 될 거라고 했던 나였소. 모유가 적어 조모님의 정성ㆍ헌신ㆍ노력으로 나를 살려주신 공덕ㆍ음덕으로 팔십을 살았네요.


당신을 만난 것도 조모님의 음덕ㆍ공덕에 고모님 장모님 만난 인연이 인생에 가장 큰 복을 받은 모자란 남자 못난 남자 위하여 평생을 희생한 당신에게 무엇으로 갚리까.


그래도 추억은 있다오. 업고 안고 걸리고 삼 남매 차 태워 선물 들고 고향 가던 그 시절. '철수 장가 한번 잘 갔네.' 나를 비꼬는 말인지 정말로 하는 칭찬인지 싫지는 안 했소. 삼 남매 탈 없이 사고 없이 착하게 자라 주어 감사하고 벌써 오십 줄이 넘어선 자식들이 대견하고 우리 부부 모르게 의논하여 산수연(팔순)을 차려 주니 흐뭇하고 감사하네요.


지금까지 살아온 이 복은 내 복이 아니고 오직 할머님의 정성ㆍ 음덕ㆍ공덕이요. 한시라도 조모님을 잊어 본 적이 없습니다. 고생하신 후덕한 할머님, 천하의 이 불손 용서하소서.


그늘진 얼굴 애수에 젖은 인상에 선보고 동정심에 일 년을 기다려 결혼해 준 안목 있는 당신. 속 깊은 넓은 남자로보였다니 대단한 관찰력을 가진 당신이 아닐지. 처이모도  반대하고 처남은 울면서 결혼식에 불참해도 우리는 신이 준 연분이요. 당신의 첫 노래 버리지는 말아 주시오. 그 가사에 가슴이 울었다오. 그래서 나는 더 열심히 살았다오. 참 고마운 당신 그대는 천사, 당신은 내 여자.


우리 부부는 배운 것은 적지만 성품과 인품이 돋보이며 너그럽고 어질게 이해하며 양보하는 마음에서 베풀고 형제자매ㆍ집안 일촌의  우애를 노력하던 당신을 참 좋아했소.

당신이 혼자 가면 귀부인ㆍ장관부인 ㆍ100점짜리 여인인데 둘이 같이 걸어가면 두 사람 바라보며 팔광에 흑싸리네. 여자들의 입방아 당신은 자존심에 멍이 들고 나는 항상 미안하고 때로는 자존심에 거리 두고 걷기도 했소.


그래도 나는 참 행복했소. 내 여자이기에 남은 여생이 얼마일지 몰라도 가족이 행복하고 실천은 못해도 마음만은 진실로 사랑하겠소. 나에겐 당신뿐이요.


2023년 5월 26일 산수연 가평에서.

심우 철수



작년에 쓰신 아버지의 편지에 이어 2000년이 다가오기 전 쓰신 편지를 한 편 더 옮겨본다.


#아버지의 편지(2)


집안 일촌에 화목을 이어준 당신에게


남몰래 흘린 당신의 눈물, 내 가슴에 간직했소.

팔 남매 덤불 속에 다져온 인내심. 장모님이 맺어준 인연이라고 참고 살아준 당신, 정말 고마워요.

이조 여인 현모양처 당신은 천사였소.

(이조 여인은 봉건적 인습에 얽매어 희생된 조선 여인을 뜻하셨던 걸까? 나중에 인터뷰를 해봐야겠다.)

남자의 자존심 때문에 손은 녹아 곤죽 되고, 곤죽 속에 연꽃이 피었다오. 천생연분은 서로가 만드는 것.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고 사랑한 당신. 당신 없으면 하루도 못하는 남자가 되었소. 붓다의 보살님 참 보살님 당신을 알고부터 부처를 알았소. 늦었지만 깨달음이 다행이 아니겠소. 먹물이 바다라도 부족한 이 마음 알아주면 좋겠소.


심우 철수




엄마를 향한 아버지의 편지. 살아온 세월을 돌아보며 그동안 엄마에게 미안한 마음을 담은 진심을 표현하신 것 같다. 무뚝뚝한 경상도 사나이의 글에서 이렇게 말랑말랑한 말들이 쏟아질 수 있을까. 읽어 내려가다 큭큭 웃게 되기도 하고 어떤 마음인지 알 것 같아서 마음 한 켠이 울컥해지기도 한다.


아버지는 늘 부모님의 손길이 그리웠던 것 같다. 남편을 잃은 아버지의 어머니는 농사일 만으로는 부족한 생활비를 위해 집을 비우셨고, 아버지의 할머니가 손주 을 먹이고 업고, 빈 젖을 물리며 키우셨다고 하셨다. 늘 부모의 품이 부족한 손주들에게 엄마 품 대신 따뜻하게 품어주셨던 아버지의 할머니. 아버지는 늘 아버지의 어머니보다 할머니의 품을 떠올리며 그리워하셨고, 아파하셨다. 그런 가난한 당신에게 자신을 믿고 와준 엄마는 천사가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거기다가 다정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경상도 사내라니. 거칠고 다듬어지지 않은 남자를 엄마의 인내로 참아내시며 긴 세월을 살아오셨으니, 내가 봐도 아버지는 아내 복은 타고나셨다. 분명, 아버지를 위한 연재글이라고 했는데 아버지에 대한 뒷담화가 되기 전에 얼른 끊어야겠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성함은 사생활 보호를 위해 가명으로 정하였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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