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빛방울 Oct 17. 2024

유자차의 마음

찬바람이 불면 점점 더 깊어지는 마음

찬바람이 불어온다. 가을이 올 때쯤 내가 잊고 있어도 날 기억하고 꼭 찾아오는 이가 있었으니. 사실은 반갑지 않은 손님이라 맞이하고 싶지 않은데 막는다고 오지 않을 이가 아니라 속수무책으로 맞이할 수밖에. 다음부터는 손수건부터 챙겨서 기다리고 있어야 같다.


'엣취~이!'

도저히 숨길 수 없는 세 가지 중에 한 가지 재채기. 숨길 수 없는 세 가지는 가난, 사랑, 재채기라고 하더라. 출처도 모른 채 이렇게 써도 되는 건지. 밥 먹으면서 누군가 한 말이었는데. 비염이 기승을 부리는 계절인 가을. 돼지풀인지 뭐시기인지 알레르기의 주범 중에 하나라고 하는데 내 눈에는 잘 띄지도 않는 돼지풀이 이렇게도 나를 괴롭히다니. 콧물에 재채기에 간지러움을 동반한다. 귓 속 달팽이관 속까지 손가락을 넣어 긁고 싶을 만큼 가렵다. 재취기, 콧물과 간지러움 때문에 코 주변이 허옇게 일어나고 눈도 간질간질하다. 거짓말처럼 아무렇지 않은 날도 있다. 아주 제멋대로 예의가 없다. 시기가 되면 어쩔 없이 병원에서 지어주는 독한 알레르기 약과 주사를 맞기도 하는데 주사를 맞은 하루 이틀까지는 살만한데 지나고 나면 소용이 없다.


냉장고 문을 여니, 유자차와 눈이 딱 마주쳤다. 몇 달 동안 만나본 적 없는 유자차. 왠지 오래오래 냉장고에서 날 기다려준 것 같다. 지속된 콧물이 목을 타고 붓게 만들다 보니 목이 불편했는데. 꿀에 켜켜이 재어진 유자차라니 얼마나 반가운지.

"언제든 나에게 와. 너의 부은 목을 가라앉혀줄게."

뜨거운 물에 유자차를 듬뿍 넣어서 마시니 부었던 목이 가라앉은 듯 느껴지고 몸이 따끈해진다. 새삼 고맙다. '유자차와 같은 마음, 나는 갖고 있는가'하고.


얼마 전부터 연락이 끊어진 친한 동생이 내내 마음에서 떠나지 않는다. 가까이 근무하다가 멀리 떠나오면서 서로 변동이 많은 시기라 만나지도 못하고 떠나왔었다. 가끔씩 전화하며 서로의 안부를 묻곤 했는데 웬일인지 통 연락이 없다. 찬바람이 부니, '언니이~~!'하고 전화했던 현화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현화야, 잘 지내지? 학교 옮기고 적응하느라 힘들었지? 허리 아픈 건 어때?"


'현화야, 며칠 전에 모임이 있어 너 사는 집 근처에 가서 생각나서 전화했었어. 잘 지내니?"


전화도 받지 않고 여전히 카톡에는 읽지 않음으로 표시된 나의 메시지. 전화번호를 바꾼 걸까? 휴대전화를 분실해서 전화번호가 홀랑 날아갔나? 이 지지배, 나한테 뭐 삐진 거 있나? 별의별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새 학기에는 나도 적응하느라 바빠서 시간이 가버렸고 여름 방학에 동기들과 만나며 현화 이야기를 하며 또 한 번 떠올랐다.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닐까? 점점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소속 기관이 바뀌자 메신저도 통해져 있지 않고 혹시나 현화 근처에 사는 다른 동기 언니에게 소식을 물었지만 허리가 아파서 병가 냈었다는 것만 알고 소식을 정확히 모르는 눈치였다. 나도 거기까지는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언니, 혹시 현화 소식 들으면 전해줘. 잘 지내고, 고마워!"


읽지도 않는 메시지를 또 보낸다. 혹시나 현화가 아닐 수도 있어서 자세히 카톡도 보내기가 망설여진다. 그런데도 자꾸만 보내게 되는 마음.

"현화야, 날씨가 많이 쌀쌀해졌어. 잘 지내지?"


그러다 알게 되었다. 현화가 많이 아프다는 것을. 마음 깊이 아파서 잠도 못 자고 일도 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가슴이 무너진다. 여전히 받지 않는 전화지만 괜찮아. 그냥 살아만 있어. 살아만.



"현화야, 날씨가 너무 춥다. 찬 바람나니까 네 생각 나. 감기 걸리지 않게 조심해."

"언제든 괜찮으니 답답할 때 전화하렴. 언제나 너의 행복을 바라는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을 잊지 마!"

"현화야, 오늘도 행복한 하루 보내!"

"현화야, 찬 바람이 부니 마음도 그렇고 잠도 잘 안 오더라. 이거 마시고 편안하게 자렴."


현화를 만났다면 차 한잔 내가 샀을 터인데, 만나지 못하니 따뜻한 차 한잔 마시며 오늘 하루에 달달함을 더했길 바란다. 지칠 때까지 잠도 자지 못하고 처방받은 수면제도 겁이 나서 못 먹는다는 너의 이야기를 전해 들으니 속상하다. 캐모마일 티를 보내주며 몇 시간이라도 푹 잠들 수 있길 바라본다.




현화에게


현화야, 유자차처럼 꿀 넣어서 유자 얇게 저며서 켜켜이 쌓아 병에 넣어두었어. 나는 이렇게 유자차의 마음으로 너를 기다리고 있단다. 너는 나에게 소중한 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으면 해. 엄마이기에 쉽지 무너지지 않을 거라고 믿지만 얼마나 힘들면 그랬겠니. 괜찮아, 지금은 그냥 넘어져서 울기도 하고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기대어서 살아보기도 하렴. 너무 완벽하게 모든 것을 하려고 하지 않아도 돼. 괜찮아. 네 곁에 함께하는 누군가가 있겠지만 그중에 한 명이 여기에 이렇게 있다는 것도 잊지 마.


언제고 네가 부르면 달려가줄게. 답답하고 하고픈 말이 있다면 언제고 털어놓으렴. 유자차 따뜻하게 타줄게. 너의 마음 깊숙이 따끈하게 데워줄게. 너의 힘든 마음 끝에 기다리고 있을게. 너의 아픔이 끝나는 날이 반드시 있다는 것을 알게 되길 바라.




편지를 현화에게 전해줄 수는 없겠지만 짧은 메시지 속에 담긴 마음이 현화에게 전해지면 좋으련만.


현화는 겉으로는 밝고 털털해 보이는 아이였다, 겉으로는. 대학 때도 그런 줄만 알았다. 늘 웃는 모습만 보아왔으니까. 집합 연수에서 그늘진 그 아이를 발견하고는 놀랐던 적이 있다. 어린 시절 삼남매를 두고 현화의 친정어머니는 일찍 돌아가셨다. 언니와 동생 사이에서 서로 살뜰하게 챙기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김치를 담가주는 친정아버지를 두었기에 현화는 세월을 견딜 수 있었을 것이다. 밑반찬이며 사소한 것들을 챙겨주셨던 아버지. 물론 엄마의 자리까지 채울 수는 없었을 것이다.


현화는 엄마 없는 아이로 보일까 봐 늘 완벽해지려고 노력했다. 공부도 열심히 했고 그림도 잘 그리는 야무지고 재능 많은 아이. 학교 발령이 나고 나서도 개인적인 삶과 교사의 삶에서 필요한 것들을 배우며 성장했다. 결혼을 하고도 대학원을 다니며 열심히 살았던 현화. 그런 현화는 늘 불안하다고 했다. 뭔가 채워지지 않는 빈자리 같은 것이 느껴졌다.


가끔 만나면 아이들 이야기, 학교 이야기를 서로 털어놓곤 했다.


"언니, 나는 매년 경력이 쌓이는데도 뭔가 불안해요. 남들처럼 빨리 일도 잘 못하는 것 같고요. 다들 너무 쉽게 하는 일들을 나는 왜 이리 어려운 가 몰라요. 큰 학교 가는 것도 너무 두려워요. 그곳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규모가 크지 않은 시골 학교에만 있고 싶어요."


현화가 그런 생각을 하며 학교 생활을 하고 있는지 몰랐다. 얼마나 스트레스가 많았을까. 내 몸에 맞지 않는 일을 하고 그 일에서 보람보다는 부담감을 느끼는 것이라면 하루도 편안한 날이 없을 것 같다.


"나이가 들어서 몸이 예전 같지 않나 봐요, 언니! 이번 학기에는 조금 쉬어보려고요."

쉬면서도 쉽게 회복되지 않은 몸 상태였지만 현실적으로 내내 쉴 수는 없었던 상황이었다. 휴직 후 복직을 하려니 있었던 작은 학교가 폐교가 되고 큰 시내 학교로 발령이 났다. 그 반 아이들이 너무 힘든 반이라 그 반을 맡았던 교사도 병휴직을 할 정도였으니. 하필이면 현화가 복직 후, 발령이 난 학교가 거기였을까. 몸이 안 좋아서 조금 쉬었다가 다시 복직하는 현화에게는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들었을 것 같다. 자신의 어려움을 주변에 쉽게 이야기하지 않는 아이가 거기서는 오죽했을까. 완벽주의 성향을 가진 현화에게 그 상황에서 얼마나 괴로웠을까. 이야기라도 나누고 고민을 털어내었으면 현화의 잘못도 부족함도 아니라는 것을 이야기하며 위로가 되었을 텐데.


내가 다른 지역으로 발령이 나고, 서로 너무 바쁜 상황을 이해하며 만나지도 못하고 떠나왔는데 그때 한 번이라도 만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무엇이 현화의 마음을 이렇게 힘들게 했길래. 현화는 지금 괜찮은 걸까. 잠도 자지 못하고 제 몸도 일으키지 못하면서 가족 걱정에 한숨짓고 있을 녀석. 나는 어찌하여 현화의 주소도 모르는 걸까. 아파트만 알고 몇 동, 몇 호인지, 남편의 이름도 남편의 전화번호도 알지 못하고.


현화와 함께 친하게 지냈던 소영이 언니도 나와 같은 마음으로 내내 걱정을 하고 있다.

"현화 일 때문에 마음이 안 좋아."

소영이 언니랑 전화하다가 눈물짓다가 다음에 현화를 만나러 꼭 가자고.


며칠 전, 현화에게서 나의 오랜 문자에 답이 왔다.



언니, 연락도 못 받고 미안해요.

내 몸과 맘이 좀 힘들어서 나도 모르게 주변 연락을 모두 피하게 되었어요.

고맙고도 미안해요. 그냥 시간이 좀 필요하니 기다려줘요.

언니, 늘 건강하고 행복하게 지내요.


눈도 흐릿하여 보이지 않을 문자에 애쓰며 보냈을 답장. 나의 문자가 무거운 숙제가 되었을까 또 조심스러워진다. 미안해할까 봐.



그래, 현화야!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살면서 힘든 시기가 있기도 하더라.

쏟아내고 비워야 할 때 언제든 들어줄게.


아플 때 충분히 앓아야 하는 시간도 필요하다.

넘 오래 힘들지 않고 그것이 무엇이든 다 지나가길 바랄게.


나는 종종 네가 보고 싶을 때 남길게.

답장하지 않아도 괜찮고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바람이 차가워지기 시작했어.

현화아, 감기 조심해.



현화가 지금의 힘든 시간을 잘 보내길 바라본다. 유자차의 마음을 담고 현화가 언제든 뚜껑을 열어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지금은 할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