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고 갈라졌던 시간을 넘어
촉촉하게 땅이 젖어들었다. 땅위에서 솟아나는 새싹은 푸릇한 건강함을 안고 하늘로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싱싱하게 맺힌 열매도 그 열매에 맺은 이슬 방울도 생기가 가득하다. 봄의 기운이 솟아오르기 시작하고 시작하는 마음으로 가득히 차올라 걸음을 걷고 있었다. 왠지 좋은 일이 가득할 것만 같았다.
하루의 시작은 쉽지 않았다. 가득 채웠던 에너지는 조금씩 고갈되어 갔다. 허덕허덕 숨을 몰아쉬며 하루를 버티고 짧은 시간 에너지를 쥐어짜야 하는 순간이 왔다. 복도를 걷는데 걷는 게 걷는 게 아니었다. 좀비처럼 터덜터덜 영혼없이 걸어가는 나를 유체이탈한 것처럼 바라보았다.
"선생님, 괜찮으세요? 어디 아파요?"
"아니요. 괜찮아요."
힘없이 나오는 내 목소리는 이미 괜찮지 않았다. 나의 역량이 부족한 탓이라고 여겼다. 처음에는 나에게서 문제를 찾으려 애쓰며 답을 얻을 수 없는 시간이 흘렀다. 오랜 시간 다져졌다고 생각했다. 내 안에는 수많은 답들을 갖고 있다고 믿었다.
함께 근무하던 선생님이 전화가 왔다.
"선생님, 잘 지내세요?"
"글쎄요. 올해는 좀 힘들어요."
"올해 다 그런건가요? 아이들 목소리가 예쁘게 들리지 않아요."
우리 곱고 고운 혜지 선생님이 그렇다면 심각한 거다. 아이들을 얼마나 예뻐하는지 얼마나 진심으로 가르치는지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얼마나 지치면 그러할까? 나도 올해는 오랫동안 쓰여질 목청과 온 몸의 감각들을 몇 년치 다 빚내어 써버린 느낌이랄까.
해마다 학급에 금쪽이들은 꼭 있다. 한 두명은 각오하고 받아들이며 맡아왔는데 올해는 그 차원이 다르다. 학기초에는 언제나 힘이 들긴 하다. 관심이 필요한 금쪽이들에게 정성 쏟아 한 두달 지나면 안정된 내 학급의 모습으로 자리하기 마련인데, 올해는 안정감있게 가르치고 학급을 이끌어 가기가 쉽지 않다. 너무 많은 아이들에게 신경을 쓰고 각기 다른 에너지를 써야해서 어디서 부터 손대야 할지 모를 때가 많았다. 하루에도 몇 번씩 내 혼을 쏙 빼놓는 아이들. 요즘 뭔가 심각하다는 생각이 든다. 누군가의 말에도 개념치않고 어떤 일에도 서슴치않고 당당하게 행동한다. 너무 솔직해서 맹랑하고 귀여울 때도 있지만 그 정도가 지나칠 때가 많다. 1학년이 맞을까 싶을 정도로 거친 표현을 쓰기도 하고, 나에게 다가와 농담을 던지기도 한다. 유튜브나 인터넷에서 들을 수 있는 언어와 내용을 아무렇지 않게 말하고 떠든다.
나는 아이들 앞에 스크린이 되는 느낌이다. 교사의 감정도 읽지 못하고, 아픔도 공감하지 못한 채 희희낙낙 웃어버리는 참을 수 없는 가벼운 행동들에 어이를 상실하게 되는 경우도 많다. 나를 바로 일으켜 세우며 단단히 힘을 주고 아이들을 이끌어 가느라 기운을 다 빼곤 한다.
그래서였나보다. 그 짧은 시간, 아이들을 보내고 나면 기운이 쭉 빠지는 느낌이랄까. 알맹이가 쪽 빠지고 누군가가 오렌지 짜듯 쭉 짜버리고 껍데가 된 기분.
나는 아이들을 사랑한다. 저학년을 선호하며 맡았던 이유도 그 맥락이다. 귀엽고 천진한 1학년 아이들의 해맑은 웃음과 순수함은 힘든 것들을 잊게 해주는 에너지가 있었다. 늘 나를 채워서 0 이상을 유지하곤 했는데 올해는 그 반대로 자꾸만 소진되기만 하고 채워지지가 않았다. 정말 마이너스에 가깝다. 이래서 내가 버틸 수 있을까 싶게 한숨이 절로 나오고 힘이 들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간 것 같다. 이젠 조금씩 회복되는 중이다. 내가 아이들에게 적응을 하여 내성이 생긴건지 아이들이 나에게 적응하고 조금씩 달라진 것인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온 마음을 다해 쏟아내지 않고 조금은 담담하게 상황에 대처하기 때문이어서 그런 걸까. 아침마다 심호흡을 하며 '오늘은' 하며 마음을 다잡고 학교로 걸음한 마음다짐 덕분일까. 그 마음을 알아차린 아이들이 생겨서일까.
여유도 없고, 여력이 없으니 마음 속 타자가 희미해지고 집에서 손가락으로 마음을 드러낼 여유를 한동안 잃었던 듯하다. 꾸준히 써오던 브런치도 하지 못했다. 브런치를 열고 글을 하나씩 읽어보기도 하며 내 글을 올릴 여유가 생긴 거 보니 이제야 기력이 회복된 모양이다.
꾸준히 달리다가 순간 멈추고 나니, 다시 끈을 매고 달리는 게 생각처럼 쉽지 않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아이들의 이야기도 나의 삶의 이야기도 하나씩 풀어가며 다시금 단단하게 나를 여미고 좋은 에너지를 채워가야겠다. 누군가의 탓이 아닌 내가 나를 다독이며 나를 바라봐주고 응원해주는 누군가의 힘으로 다시 달려야겠다. 어딘가에 차곡차곡 채워두었던 곳간 열쇠를 다시 찾아 열어봐야겠다. 내겐 그런 힘이 있었지, 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