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쪽으로 가면 귀인을 만날 걸세!
며칠 전부터 다가오는 토요일이 기다려졌다. 매주 일요일 아침마다 만나는 온라인 북클럽 친구들을 만나는 날. 전국에서 모이다 보니, 장소는 중심이라 여겨지는 대전으로 정해졌다. 전날 저녁 짐을 이 가방에 넣었다가 저 가방에 넣었다가. 파우치를 넣었다가 뺏다가, 가져갈 짐을 챙기며 사소하지만 소소한 행복을 느낀다. 남편은 이해할 수 없는 표정으로 쳐다보고 딸은 정해진 의상코드로 입을 옷 중에 뭐가 더 나을지 같이 고르느라 분주하다. 이런 딸이 없었다면 들떴던 기분은 땅으로 떨어졌을 테지만 딸이 맞장구를 쳐주니 얼마나 신나던지.
이른 아침부터 분주하고 바쁘다. 늘어놓은 책이며 갖가지 도구들을 치우고, 쌀도 담그고 먹을 국도 끓인다. 시간이 많이 남을 줄 알았더니 어쩌다 보니 기차를 타러 갈 시간이 임박하다. 다행히 어젠 빼꼼하게 쳐다보던 남편이 데려다줘서 지하철을 탈 수 있었지만 그 또한 차를 놓칠 뻔했다.
#첫 번째 귀인 - 생명의 은인
10시 15분 지하철을 타야 하는데 14분에 도착했으니 놓치면 이건 정말 큰일이다. 짐을 들고 사력을 다해 계단을 뛰어올랐다. 문이 닫히기 직전 겨우 올라타고는 가뿐 숨을 몰아쉬었다. 내 앞에 앉아계시던 어르신의 곱지 않은 눈초리가 느껴졌다.
'내가 너무 요란하게 뛰어 들어왔나?'
'왜 자꾸 쳐다보시지?'
애써 모른 척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며 아직 고르지 못한 숨을 천천히 내보냈다.
"어디까지 가세요?"
"아, 서울역까지요."
"내가 석계역까지 가니까 거기서부터 여기 앉아요."
"네, 감사합니다."
"근데 아까 숨을 너무 거칠게 쉬어. 그게 폐를 엄청 상하게 할 수 있거든. 스스로 내 호흡을 조절할 수 있어야 해요."
"아, 그래요?"
아까 나를 유심히 바라본 건 걱정스러운 마음이었나 보다. 그 마음을 내게 전해주시니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폐는 습한 것도 싫어하고 과하게 호흡하는 것을 싫어해요. 견디지 못하는 순간 찢어지고 말거든. 평소에 호흡을 길게 하는 습관을 갖도록 해봐요. 숲이나 산에 가서 호흡하면 더 좋고. 거기에 잘 말린 오미자를 우려서 마시면 더 좋지."
"몰랐어요. 이렇게 알려주셔서 감사해요. 근데 혹시 그 분야에서 일하시나요?"
"네, 맞아요."
"그럼 의사세요?"
고개를 끄덕이며 조금은 멋쩍은 미소를 지어 보이셨다.
"나는 우리 손주들이 오면 무조건 도시락을 싸들고 산으로 들로 나가요. 그러면 얼마나 신나게 잘 놀고 잠도 잘 자는지 몰라."
잠시 잠깐의 스치는 인연이었지만 짧은 시간 나눈 지하철에서의 인연은 나에게 새로운 경험이었고 귀한 인연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분이 나가시고, (내리시자마자 갑자기 쏙 앉아버린 젊은이 덕분에 앉지 못했지만) 서서 마음으로 다져보았다. 호흡에 신경을 좀 써야겠다고. 가족들과 요즘처럼 좋은 날씨에 산을 올라가는 상상도 한다. 살면서 놓쳤을지 모르는 숨 쉬는 순간에 생각을 넣어준 생명의 은인. 그녀는 내게 그렇게 귀한 스치는 인연이 되었다.
#두 번째 귀인 - 아가 천사
지하철을 시간에 맞게 탄 덕분에 기차를 타러 가는 동안에는 발걸음이 여유를 찾았다. 선반에 짐을 올리고, 책상을 펼치니 엄마와 아가가 내 옆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엄마가 짐을 올리는 동안 의자에 몸을 기댄 아가와 가볍게 손을 흔들며 먼저 인사를 했다. 요즘은 작은 아가들을 볼일이 많지 않다. 그래서인지 자꾸만 아가들에게 눈이 간다. 얼마나 이쁜지. 뭐라도 주고 싶어서 가방을 뒤적였다. 기차에서 먹으려고 챙겨 온 작은 파운드가 보였다. 주섬주섬 꺼내 들었다.
"이거 아가 줘도 돼요?"
"아, 네. 감사합니다."
요즘은 밖에서 누군가가 선한 마음으로 무언가를 건네어도 먹을 수 없는 흉흉한 세상. 혹여나 받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며 조심스럽게 전해주었는데 흔쾌히 받아주었다. 아가는 꼬물꼬물 손으로 파운드빵을 들고 뽀*로 음료수와 맛있게도 먹었다. 그 모습만 보아도 내 표정은 이미 천국. 아가들은 선물이구나. 나는 너를 알지도 못하는데 이런 행복한 마음을 전해주니. 30분 정도 지났을까? 아산에서 아쉬운 이별을 하고 말았지만 스치고 지난 예쁘고 귀한 인연.
"안녕!"
나의 손짓에 작은 손으로 응답을 해주었다. 고맙고 행복한 꼬마 천사의 손짓.
'고마워, 꼬마 천사!'
#세 번째 귀인 - 성냥개비 소녀
두 번째 귀인을 스쳐 보내고 다시 책을 펼쳤다. 아산역에서 빈 내 옆자리가 대학생으로 보이는 학생이 대신해 주었다. 딸에게 선물했던 노인과 바다를 빌려왔다. 짐은 많은데 책은 챙기고 싶고, 얼마 전 딸에게 선물해 주었던 미니북이 떠올랐다. 무겁지 않아서 좋은데 글씨가 깨알 같아서 오래 보지는 못할 것 같다. 다행히 목적지까지 30분도 채 남지 않았으니 잠깐 읽기에는 무리가 없다.
"저기 혹시 책 읽는 거 좋아하세요?"
"아, 네네. 좋아해요!"
말을 걸어오는 학생의 목소리가 다정했다.
"이거 좋아하실 것 같아서요."
핀케이스에서 꺼낸 성냥개비 하나.
"어머, 이게 뭐예요?"
뜻밖의 선물을 받고 나는 상기된 얼굴로 학생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성냥개비 모양의 앙증맞은 볼펜은 나를 감동시키기에 충분했다. 모르는 누군가가 내가 책 읽는 모습을 보고 좋아할 것 같아서 꺼내든 선물이라니!
"이거 저한테 주셔도 돼요?"
"네, 저한테 한 개 더 있거든요."
아산에서 사는 대학생은 친구를 만나러 대전을 가는 길이라고 했다. 나도 모임이 있어 대전으로 여행 중이라며 다 와 가는 기차에서 짧은 대화를 나누었다.
"덕분에 오늘 너무 감사한 하루가 되었어요. 고마워요!"
이 학생은 어떤 마음을 가진 사람일까? 참 잘 컸다는 생각도 들고 이런 마음을 가진 학생을 보니 왠지 기특하고 정말 예뻐 보였다.
여행을 시작하기도 전에 하루에 한 명도 아닌 세 명의 귀인을 만나서 가슴이 벅차오르기 시작했다.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서 바로 이 순간의 느낌을 전해주고 싶고, 친구에게 이런 일이 있었다고 수다를 떨고 싶게 만들었다. 곳곳에 보물처럼 숨어있다가 우연히 발견한 깜짝 선물처럼 소리 없는 환호성을 공중에 뿌렸다. 이번 여행의 시작은 그렇게 쏟아지는 별빛을 받으며 황홀하게 대전으로 입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