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틀라스 바다를 건너온 역할
박사학위 디펜스가 있기 전 1주일, 가족들이 독일에 찾아왔었다. 2024년의 4월 베를린의 날씨는 아직은 덜 풀려서 쌀쌀했다. 겨울이 특히 길고 북해의 영향은 안 받는 것 같은 이 변칙스런 곰의 도시는 4월에도 우박이 떨어지곤 했다.
가족들을 공항에서 기다리는 그 순간이 초조했다. 말로 표현할 수는 없는 가슴속 어딘가가 채워지는 느낌.
단순히 본다는 기대감의 설렘이 아닌 행복한 감동이 찾아오는 감정이다. 가족들이 코로나로 찾아오기 어려웠던 이유를 둘째치고 당시 직장인의 신분인 동생의 일정을 함께 맞추기란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 먼 유라시아의 대륙에 같은 발을 딛고 있다는 마음에 몇 년 만에 만나서 그런지 당신의 아들을 한눈에 못 알아봤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묵직해 보이는 캐리어백과 더플팩, 어머니는 캐리어백 끄는 것을 힘들어하셨다. 쇳덩이라도 넣은 건지 뭔 물건들을 이렇게 싸 온 건가. 아버지와 동생도 마찬가지였다. 브란덴부르크 공항을 나와 FEX(Flughafen Express)를 타고, S-bahn에 Tram, 족히 1시간을 걸리는 거리를 앉지도 못하고 무거운 짐과 함께 했다.
6평도 안 되는 좁은 원룸방, 부모님은 오자마자 잠을 청하셨다. 공간이 좁아 매트리스 위에 주무시던 어머니는 1시간도 안되어 갑자기 발에 쥐가 난다며 놀라게 했다. 숨이 턱턱 막힌다며 하마터면 구급차라도 부를 뻔했다. 그 먼 장거리 비행을 오시며 긴장되신 거다.
비행 내내 잠도 못 자고 단순히 당신의 아들이 있는 곳에 간다는 막연한 마음으로 향했지만, 생판 들어보지도 못한 곳에 대한 항해는 이 50대 여인에겐 두려움으로 가득했었던 것 같다. 혈행순환제도 까먹을 정도로.
서양권의 세계로의 모험은 아버지 어머니 동생 모두 처음이었다. 언어의 장벽과 낯선 세계는 이들을 더욱더 겁을 주어 초조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괜히 걱정할까 봐 전화로 도움을 청하지도 않았다. 참 고집들 세다.
그렇게 이 먼 곳까지 챙겨 온 캐리어백 안에는 비닐 랩으로 견고하게 담아진 뭉치들이 나왔다. 커피, 누룽지, 한식 밀키트, 마스크, 그리고 각종 상비약 등, 오롯이 당신의 아들을 위한 물품들로 가득했다. 얼마나 칭칭 감았는지 하드 커버 전공서적과 비슷했다. 푸는데도 한 참인 이 순간, 내게 누룽지를 먹이겠다며 어머니가 나섰다.
아버지는 일어나자마자 끌을 찾으셨다. 인덕션 위에 붙어있는 이물질들을 다 청소하시고 나서야 마음이 놓이셨는지 고기를 구워주신다. 좁아터진 공간에서도 나무들 셋이 죽이 잘 맞는다. 왜 당신의 모질이 아들을 상전 모시듯 하나. 나는 다시 또 불효자가 되었다.
당시 나는 학위 디펜스 연습을 하고 가족들은 베를린을 돌아다니기로 했다. 우선은 추워서 옷을 사러 간다는 말에 화가 났었다. 대체 그 큰 캐리어백에 왜 당신들의 물건이 없는가. 연습하는 내내 끌어 오르는 감정 때문에 진정시키는데 애를 먹었다. 이 날 U-bahn 길을 알려주고 돌아오던 도중 우박이 내렸었다.
그렇게 모든 게 다 끝나고 다시 독일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아버지가 그 큰 캐리어백을 가져가라며 챙겨 주셨다. 이 캐리어백은 유라시아의 독일로, 프랑스를 통해 북미 대륙을 건너 다시 또 먼 곳을 향하게 내 목숨줄을 이어주었다. 사실 이 하드 캐리어가 마치 나를 가족들이 단단한 마음으로 응원해 준 것처럼 느껴져 좋아했지만, 바퀴가 무게를 버티지 못해 그만 부서져버렸다. 마음 한편으로는 저 부서진 바퀴가 가족들을 소중히 하지 않는, 이기적인 그런 모질이 아들의 만행으로 비치는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아쉬움과는 좀 다른 느낌이다.
"박사라는 놈이 그것도 모르냐"
아버지는 다시 또 당신의 나사 빠진 아들에게 빨간 공구 상자를 무작정 들이미신다. 바퀴가 고장 났다는 말에 하나하나 유튜브에 바퀴 구매처까지 며칠을 보셨다고 한다. 이곳에서 고칠 수 있다는 말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멍텅구리 박사의 캐리어백을 손수 고쳐주실 생각이다.
내 귀중품 지켜주는 캐리어백은 내 목숨줄도 지켜준다. 딱딱한 겉표면과 달리 속은 물렁하니 평안한 모습은 바다를 건너 멀리 나온 것 같지만, 여전히 당신의 보호를 받고 있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