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생의 귀인들
흰색 심지 위에 붉게 살랑이는 촛불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소원 들어주나?라고 물으면 들어줄 듯 말 듯하게 불씨의 꼬리를 흔들어 답하는 것 같다. 오랑대 촛대 바위, 푸른 바다 위의 법당, 2-3평 남짓도 안 되어 보이는 공양터인 이곳에 사람들이 파도를 건너 찾아왔다. 두 손 모아 고개 숙여 비는 이들의 경건함에는 세월의 주름이 눈에 띄게 담겨있다.
그런데 내 옆에 서 있는 중년의 여성, 이 60대 중반의 여인은 왜 나를 이렇게 빌어주는 걸까. 본인부터 그렇게 고생해오며 살아 놓고는, 단지 바다 너머에서 살고 있을 뿐인 당신의 조카를 위해 꿈과 안녕을 빌어준다. 빌고 빌다 무언가 감정 복받쳤는지 또 눈물을 흘려주고 계신다. 아무것도 못 해줬던 게 마음에 걸린다는 당신의 중얼거림. 그깟 공부.
나의 어머니, 그리고 그녀의 언니들은 언제나 배움에 한이 서려있다. 시대에, 상황에, 그리고 환경에 지원받지 못했었던 것에 마음 아파한다. 이들의 먼 기억에 남겨진, 없었던 것들로부터 오는 그 서러움은 모질이는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이들이 이룩한 지금의 상황에서도 뭔 조카 걱정을 이렇게 하십니까. 내가 바다 건너 죽으러 떠나는 게 아닌데. 당장에 음식, 용돈, 그리고 인연까지. 이들의 사랑의 방식은 단순하면서도 과장되었다. 그저 최선으로 해주고 싶은 건 다 챙겨주는 듯하다. 나는 우리 집에서도 여기서도 금명이를 벗어나지 못한다.
이번에는 한국을 떠나오고 더욱이 확신을 가지게 된 순간들이 있다. 그런 상황에 처해 물론 당혹스러웠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이해가 갔다. 부처님이 혹은 신이 나를 이곳에 오게 한 이유가 있겠지.
나의 이번 생은 이들과 만나기 위해 온 것 같다. 마치 먼 거리를 여행하며 온 것처럼 우연히 이들을 만나게 된 장소가 지금의 시간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찾아가야 하는 길은 멀고도 멀지만, 어디로부터 인가 길을 잃고 멈춰 섰던 한 모험가가 이들의 등불 덕에 나아가는 것만 같다. 단지 막연한 마음 만으로, 인연인지 운명인지 불완전한 존재는 그 까닭을 이해할 수 없지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게 덜 복잡할 것 같다. 이들이 등불을 밝혀주는 한 나는 이 어지러운 숲속 같은 모험을 잘 마칠 수 있다.
미로와 미궁의 차이는 선택할 수 있는 길의 개수라고 한다. 미궁은 복잡해도 결국 답이 한 가지밖에 없는 선택의 끝으로 향한다. 나는 이 모험의 끝을 이미 정해 놨다. 내가 행복하기로 된 것이다.
매번 큰 벽에 막혀 머리 싸매고 고민하고 있는 모질이 머저리 같은 내 스스로가 밉다고 해도, 다시 또 별것 아니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결국 부딪혀서 깨지든, 다시 일어나 살아가든 현실에 내가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