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제일 나중에 챙겼다

왜 공황은 끝까지 버텨온 삶에 오는가

by DrPsyche

공황은 대개 갑자기 찾아오는 것처럼 느껴진다. 아무 이유 없이, 아무 맥락도 없이. 어느 순간 생각보다 몸이 먼저 반응한다. 숨이 가빠지고, 심장이 빨라진다. 무언가 잘못되고 있다는 감각이 온몸을 훑고 지나간다.


그러나 상담실에서 만나는 공황은 거의 예외 없이, 이미 오래전부터 쌓여온 시간의 끝에서 나타난다.


그 방식은 대개 문제없이 살아가는 방식이다. 묵묵하고 성실하며, 맡은 일을 끝까지 해내는 삶. 이들은 대부분 이미 충분히 어른답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다. 책임을 다하고 관계를 유지하며, 주어진 기대를 충실히 수행한다. 그래서 그 누구도 그들에게 괜찮으냐고 묻지 않는다.


그들의 삶을 들여다보면 한 가지 공통점이 보인다. 타인의 기대에 맞추어 스스로를 조정해 온 시간. 그 긴 시간 동안 뒤로 밀려난 것이 있다. 자신을 돌보는 일.


그래서 공황은 단순히 불안이 커진 상태가 아니라, 그 방식으로는 더 이상 버틸 수 없다는 처절한 몸의 선언에 가깝다. 첫 공황은 대개 무너지기 시작한 삶이 아니라 끝까지 버텨 온 삶의 한복판에서 불현듯 찾아온다.




이 몸의 선언은 아무 맥락 없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대개는 어떤 계기를 만나며 더 분명한 형태로 드러난다. 상담 장면에서 반복적으로 보게 되는 순간이 있다. 죽음과 가까워지는 순간을 맞닥뜨릴 때, 그리고 많은 사람들의 시선 속에 들어선 순간. 겉으로는 전혀 다른 사건처럼 보이지만 두 경우 신체가 받아들이는 신호는 유사하다. 통제할 수 없고, 피할 수 없으며, 지금의 상태로는 안전하지 않다는 감각.


그 사건은 언제나 원인이라기보다 마지막 스위치에 가깝다. 이미 오래 누적되어 있던 버거움이 더는 감당될 수 없는 한계에 이르렀을 때, 몸은 그 장면을 통해 이제 한 발만 더 디디면 정말 위험해질 수 있다고 경고한다.


공황이 이처럼 강하게 반응하는 지점에는 대개 생존과 관련된 감각이 깔려 있다. 물리적인 생존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관계에서 버려지지 않는 일, 기대에 부응하는 일, 타인의 시선 안에서 끝내 무너지지 않는 일이 어떤 이들에게는 삶과 죽음의 문제처럼 내면화되어 있다.


그래서 누군가의 시선 앞에 선다는 것은 단순한 긴장이 아니라, 내 존재가 시험대에 오르는 순간처럼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많은 사람들의 시선 앞에 서는 순간이 공황의 트리거가 되는 것도 그래서다. 그 장면은 사람 많은 자리가 아니라, 무너지면 안 되고 기대를 충족해야 하는 자리로 몸에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도 몸은 먼저 숨을 가쁘게 하고 위험을 감지한다. 공황은 그렇게, 더는 감당할 수 없는 버거움 앞에서 몸이 먼저 울리는 알람이 된다.




그리고 이들의 삶을 더 들여다보면, 그들은 대부분 타인을 잘 돌보는 사람들이다. 누군가를 살피고, 인정하고, 빛나게 하며 자신이 받고 싶었던 것을 타인에게 먼저 건네는 방식으로 살아온 사람들이다.


그 선택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을 좋은 사람으로 보이게 하고, 실제로 그들은 좋은 사람인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자신에게로 향하는 돌봄은 오랫동안 뒤로 밀려난다.


그래서 공황은 때로 단순한 붕괴가 아니라, 충족되지 못한 자기 욕구가 더는 미뤄질 수 없다는 신호가 된다.




공황 이후, 사람들은 여러 방식으로 반응한다. 누군가는 그것을 계기로 자신이 짊어지고 있던 자리에서 잠시 물러난다. 그러나 그것은 삶의 방식이 바뀐 것이라기보다, 더 버티기 어려운 현실에서 잠시 거리를 두는 반응에 가깝다. 누군가는 그것을 일시적인 문제로 남겨둔 채 다시 이전의 방식으로 돌아간다. 아픔은 여전히 남아 있지만, 해야 할 일을 해내는 쪽을 택하면서 자기 자신을 돌보는 일은 다시 뒤로 밀려난다.


그러는 동안 몸은 더 깊이 상처 입는다.


또 어떤 이들은 그 경험을 통과해 간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무엇에 오래 다쳐 있었는지, 왜 그렇게까지 버텨야 했는지를 이해하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자신 역시 관심과 돌봄이 필요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비로소 인정한다. 있는 그대로 귀한 존재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며, 삶의 기준이 이때 바뀐다.


어쩌면 극복이라는 말은 이 경우에만 가능할지도 모른다. 변화는 단순히 공황의 증상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평가하는 기준이 완전히 다시 쓰이는 일이다. 그동안은 아무리 해도 충분하지 않았던 것들이 사실은 이미 충분했음을 비로소 이해하게 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이라는 것. 그것을 온몸으로 배워야 하는 숙제가, 때로는 공황이라는 이름으로 찾아오기도 한다.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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