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테나를 끌 수가 없다

감각이 과부하된 삶에 대하여

by DrPsyche

사무실에는 열 개 남짓한 자리가 방을 빙 둘러싸고 있다. 각자 편한 시간에 와서 눈이 마주치는 몇 명에게 눈인사를 하고 조용히 벽을 바라본 자기 컴퓨터 앞에 앉아 일을 한다. 돌아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도각거리는 키보드 소리만 들린다.


나도 내 자리에 가서 컴퓨터를 켠다. 그 순간, 뒤통수로 사람들이 수신되기 시작한다. 나도 오늘 해야 할 것들이 많다. 집중해야 한다. 그런데 어김없이 또 알아지고야 만다. 오늘 저 사람은 무척 가라앉아 있고, 저쪽은 어제와 달리 날이 서 있고, 또 저 사람은 오늘따라 이상하게 들떠 있다. 아무도 말을 걸지 않았다. 그냥 각자 앉아 있을 뿐이었다.




오늘은 특강이 있다. 학계에서 가장 저명하시다는 분을 힘들게 모셔온 자리다. 강의실에 오십 명 남짓한 사람들이 모였다. 나는 중간보다 뒤쪽에 자리를 잡는다.


그분의 빨간 안경테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다. 저 사람의 성향은 어떠하며, 저 강렬한 안경은 무엇을 의도한 선택일까. 생각을 하기도 전에 프린터에서 뽑혀 나오듯 죽죽 나열되기 시작한다.


그분은 나를 인지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중간 뒤 구석진 자리서 혼자 경계하며 한껏 가드를 올리고 그분에게 낯을 가리고 있었다.




구내식당에서 밥을 먹고 있을 때였다. 신입 동료와 둘이 앉아 있는데 부장님이 슬그머니 다가왔다.

"식사 자리에 함께 해도 될까요?"

나와 동료는 눈빛으로 말을 주고받았다.

'아, 불편해. 뭔데 왜? 뭐 하려고.'


나이스한 듯, 유쾌한 듯, 친절을 가장한 몇 마디가 오가고 나서 — 여지없이 본론이 나왔다. 슬그머니 캐묻기 시작했다. 의도가 있었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미 알아지고야 말았다.


그의 얼굴이 혀를 날름거리는 뱀과 겹쳐 보였다.


그 순간부터 밥이 넘어가지 않았다. 억지로 몇 숟갈을 더 떴지만 결국 자리를 박차고 나와 화장실로 갔다. 먹었던 것들이 도로 올라왔다.


몸이 먼저 알았다.




나름의 규칙들이 있다. 핸드폰은 항상 무음. 극장은 가지 않는다. 집안일을 할 때는 이어폰을 낀다. 혼자 식당에서 밥을 먹을 때는 사람들을 등지고 벽을 보고 앉는다. 가급적 혼자 일한다. 지루해하는 학생의 얼굴은 보지 않는다. 차단할 수 있는 건 차단한다.


반면, 막아서 안 되는 것들도 있다. 장갑은 잘 끼지 않는다. 신발을 신겨놓은 강아지처럼 균형이 잡히지 않는다. 비슷한 이유에서 항상 소매는 걷는다. 후각도 열어둔다. 이게 다 쓸모가 있다. 막으면 안 된다. 냄새로 생각보다 많은 것들을 알 수 있다. 어떤 사람에게서는 정돈되지 않은 채 방치된 집이 연상되는 눅눅하고 내려앉아 눌어붙은 냄새가 난다. 어떤 사람은 뿌연 냄새가 난다 — 거위털 베개가 터진 것처럼, 그의 정신이 여기저기 흩날리는 것 같다. 또 어떤 사람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줄과 각이 맞춰진 대형 마트 통조림 진열대 같은 냄새가 난다. 그리고 어떤 때에는 서늘하게 날이 선 칼날의 냄새가 난다. 이런 사람에게서는 가급적 빨리 달아나는 게 좋다.




나는 꽤 친절한 사람이다. 우리 외할머니는 나를 몸에 착착 감기는 옷감 같다고 했다. 그래서 나를 '우리 참베'라고 불렀다. 그런데 내가 친절한 사람이라는 건 — 맞는 말이기도 하고, 아닌 말이기도 하다.


빛에 예민한 사람이 선글라스를 끼듯, 촉감에 예민한 사람이 늘 긴팔을 입듯 — 내 친절함은 내가 세상을 견디는 방식이다. 너무 많이 수신되지 않기 위해, 나도 모르게 덧입게 된 갑옷일 테다.


말랑한 말투로 친절하게 웃는 나는 사실, 생각보다 냉정하다.




상담실에서는 조금 다른 내가 된다. 거기서는 갑옷을 내려놓는다. 그 사람의 아픔이 생생히 닿아야 하니까. 입은 채로는 닿을 수가 없다.

그래서 상담실에서의 나는 더 다정하지만 덜 친절하다.


때로는 그의 진흙탕을 같이 구른다. 상담을 배울 때, 내담자의 감정에 휩쓸리면 안 된다고 배운다. 그런데 때로는 앞뒤 재지 않고 뛰어들어야 할 때가 있다. 그 절박한 아픔은 거기 들어가야만 함께 이해할 수 있을 때가 있다.




이런 예민함을 무디게 한다면 나는 좀 더 편안히 살 수 있을까. 예민한 사람들은 이 질문을 꽤 자주 한다.

이걸 고칠 수는 있는 건지, 고치면 좋은 건지.


나도 그 시도를 해본 적이 있다. 느끼지 않으려고 했다.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다. 꽤 오래, 무던히 노력했다. 어느 정도 성공했다고 생각한 적도 있다.


치과에서 마취를 하면 통증이 사라진다. 그런데 그 무감은 무척 기분이 나쁘다. 아프지 않은데, 내 얼굴이 내 것이 아닌 것 같은 느낌.

느끼지 않으려 했던 시간이 그랬다. 통증은 없었다. 그런데 내가 내가 아닌 것 같았다.

무척, 불쾌한 권태로움이었다.


감각을 되돌리려 했다. 그런데 한번 마비된 감각은 그렇게 쉽게 돌아오지 않았다.

다시 나를 찾아가는 데도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더듬 더듬..내가 나로 돌아가는 기분이었다.




나는 예민한 감각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는 순간을 좋아한다.

서로의 주파수를 캐치해서, 튠이 맞춰지는 그 강렬한 순간.

수많은 말들을 뛰어넘어, 우리는 동시에 그 작은 조각을 함께 잡아 올린다.

목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