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화 아이스 위에서 자라는 아이
첫째 조카의 AAA 아이스하키 캠프가 시작된 첫날이었다.
첫째 조카는 AAA 아이스하키 캠프에 참가하게 되었고, 장소는 BWG 링크장이었다. 이곳은 과거 김연아 선수가 피겨 훈련을 받았던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얼음 위에서 흐르는 역사의 자취 때문일까. 시설은 매우 훌륭했고, 하키 캠프뿐만 아니라 아이들을 위한 다양한 서머스쿨 프로그램도 함께 운영되고 있었다.
큰 조카가 속한 AAA팀의 캠프 스케줄은 생각보다 훨씬 빡빡했다.
아침엔 온종일 링크 훈련, 오후엔 지상 훈련. 이미 알고 간 일정이었지만, 시차 적응조차 끝나지 않은 시점에서 바로 훈련에 돌입했다. 게다가 첫 주 주말엔 3일 연속 토너먼트 경기까지 예정되어 있었다.
첫날 훈련을 마친 후 조카가 집에 와서 엄마에게 했다는 말이 인상 깊었다.
“엄마, 이 캠프 누가 신청한 거야...? 진짜 힘들어.”
그 후로 한 달 내내, 입에 달고 다닌 말도 역시 “힘들어, 힘들어”였다.
조카를 더욱 힘들게 한 또 하나의 이유는, 우리가 예상한 ‘캐나다’와 실제 경험한 캠프 분위기 사이의 간극이었다.
우리는 당연히 영어가 기본이겠거니 생각했지만, 캠프 참가자 중 80% 이상이 러시아 출신, 감독 역시 영어를 쓰는 러시아계 감독이었다. 물론 캐나다 현지 코치도 있었지만, 훈련의 주도권은 러시아어 사용자들에게 있었다.
심지어 토너먼트 중계 영상도 러시아어로만 방송되어, 우리는 결국 소리 없는 영상으로 경기를 지켜보는 웃픈 상황을 겪기도 했다.
캐나다에 오기 전, 현지에 살고 있는 지인에게 들은 이야기가 떠올랐다.
코로나 시기 이후 난민 수용 이민 정책으로 인해 러시아, 우크라이나, 인도, 중국 등 다양한 나라에서 이민자가 급증했고, 예전의 ‘살기 좋은 캐나다’는 더 이상 환상이 아니다는 말이었다.
큰 조카는 친구를 좋아하는 아이였다. 낯선 환경에 적응하는 것도 버거운데, 말도 통하지 않고(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아이들은 대부분 러시아어와 영어 모두에 능통했다), 체격도 훈련 강도도 다르니, 하루하루가 고된 나날이었을 것이다.
BWG 링크장에서 훈련받는 조카
하지만 어른들의 입장에선 오히려 이런 상황이 조카에게 꼭 필요한 성장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넓은 세상,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며
경쟁 속에서 내가 더 노력해야 한다는 걸
몸소 배우는 시간.
조카도 힘들었지만, 어른들 역시 쉽지 않은 시간이었음을 솔직히 고백하고 싶다.
아이들이 힘들어할 때마다 “정말 이런 넓은 세상으로 보내는 게 맞는가”라는 질문을 수없이 되뇌었고, 그때마다 “어디서든 어려움은 생긴다”며 스스로에게 긍정의 회로를 돌려보곤 했다.
이 글을 쓰며, 조카의 마음으로 돌아가 본다.
한국에서처럼 링크 위를 자유롭게 누비고, 신나게 슛을 날리던 아이였는데, 여기서는 낯선 언어, 낯선 친구들 속에서 긴장과 위축이 매일 반복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역시 팀 스포츠의 힘이랄까. 점차 팀원들과 어울리며 적응해 나갔고, 첫 캐나다 토너먼트 경기에서는 메달도 목에 걸 수 있었다.
캐나다에서의 첫 메달
이 책의 후반부에 더 자세히 다루겠지만, 캠프가 끝나던 날 조카는 일기장에 이렇게 적었다고 한다.
“캠프 초반에는 너무 힘들었는데… 이제는 정든 친구들과 헤어지는 게 아쉬워.”
정말 그렇다. 아이들은 어른들보다 더 빨리 적응하고, 더 빠르게 성장한다.
처음 며칠은 모두 밤잠을 설칠 정도로 긴장의 연속이었지만, 한 달이 끝나갈 무렵엔 하키 실력뿐 아니라 마음의 깊이까지 한 뼘 더 자란 조카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낯선 땅, 낯선 언어, 낯선 사람들 속에서 아이가 발견한 건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후회 없는 한 달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