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과연 파워포인트를 정말 파워풀하게 사용하고 있나?
회사에서 한 때 내 별명은 파워포인트기술사, 장표사, PPTer라 불렸다. 신입 사원 시절 처음 배운 건 코드가 아니라 파워포인트였고 그것을 잘 다루는 것은 출세의 지름길이자 선배들부터 귀여움을 받는 가장 쉬운 방법이기도 했다.
90년대 말 한국의 대기업들은 좁은 국내 시장에서 벗어나 해외 시장을 본격적으로 개척하기 시작하면서 유수의 컨설팅펌으로부터 소위 컨설팅이라는 것을 받았다. 조직은 어떻게 꾸려야 하며 마케팅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나라에 맞는 상품 기획은 이러이러해야 하고 글로벌 공급망과 물류는 이렇게 준비해야 한다 등 이른바 외국물 먹은 고학력의 컨설턴트들이 우물 안 개구리였던 기업들에게 '한 수' 가르쳐 주던 시기였다. 당시 이들이 사용했던 파워포인트는 그야말로 예술의 경지였다. 알록달록한 컬러와 형이상학적인 도형들이 서로 화살표로 연결되며 확신에 찬 텍스트들은 근엄하게 슬라이드의 상단에 자리 잡았다. 경영진들은 이 놀라운 작품에 즉시 매료되었으며 급기야 직원들에게 너희들은 왜 이렇게 보고 못하냐고 핀잔을 주기에 이르렀다. 젊은 컨설턴트들이 이 기술을 가지고 엄청난 돈을 받아 간다는 것도 억울했지만 이들과 비교당하는 것은 늘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단순히 아름답기만 한 것이 아니라 거기에 담긴 수많은 의미들이 매우 깊이가 있고 논리적이기 조차 하다는 것에 다시 한번 좌절과 부러움에 휩싸이게 되었다.
나도 해보자.
파워포인트 테크닉은 사실 그리 어렵지 않다. 초등학생들도 파워포인트로 곧잘 숙제를 하니까. 그냥 도구일 뿐이고 쓰다 보면 늘게 되어 있다. 모든 일이 그렇듯이 처음엔 단순해 보여도 그것이 나의 일이 되고 시간이 쌓이면 처음에 보이지 않던 심오함이 보이게 된다. 파워포인트의 핵심은 테크닉이 아니라 주제를 얼마나 잘 표현해 내느냐, 군더더기 없는 텍스트를 어떻게 한 줄에 녹여낼 것인가, audience의 시선과 생각의 흐름을 어떻게 일치시키면서 presenter의 주장을 주입시키느냐에 대한 예술의 영역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어떤 분야에서든 어느 정도의 경지에 도달했을 때 자연스럽게 추구하는 것이 바로 단순함(Simplicity)이다. 몇 년의 시간이 지나자 이른바 고수들의 파워포인트에는 컬러가 빠지기 시작했다. 도형의 배경 컬러는 물론 그라디에이션, 그림자는 모두 제거되고 의도적으로 빈 공간이 삽입되기 시작했다. 선배들은 1사 1도의 원칙을 내게 가르쳐 주었다. 당시 내가 항상 염두했던 것은 1장의 슬라이드를 10초 안에 스스로 설명해 보는 것이었다. 만약 60초가 걸렸다면 필요 없는 메시지를 제거하고, 그래도 줄지 않으면 두 장으로 나눴다.
마침내 나는 파워포인트 기술사라는 웃기는 별칭을 얻었고 많은 선배들이 임원 보고에 쓸 자료들을 가지고 와서 조언을 해달라고 했다.
잡스의 이상한 파워포인트
파워포인트 장인들에게 충격을 준 희대의 사건은 애플 스티브 잡스의 아이폰 발표였다. 텍스트는 거의 사라졌고 사진 한 장으로만 만들어진 슬라이드, 세련되고 절제된 강렬한 톤, '일단 자료 먼저 보내주세요'가 통하지 않는, 그 자리에 반드시 그가 직접 보여줘야만 의미가 있는 바로 그 프레젠테이션이었다.
물론 회사에서의 파워포인트도 진화를 거듭했다. 핵심을 꿰뚫어야 하는 거버닝 메시지(Governing Message)가 줄어들고 거의 출판의 영역을 침범하기 시작했다. 모든 가이드, 프로세스, 설명서, 목록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파워포인트는 이제 만능 에디터가 되었으며 사람들은 더 익숙해지고 중독되어가기 시작했다.
스티브 잡스가 사용했던 키노트는 그렇게 강렬하게 세상을 바꾸기 시작했지만 파워포인트는 세상이 원하는 대로 순응하기 시작했다.
Anti Powerpointer가 되다
식사를 하면서 나의 생각을 설명하자 당시 임원이었던 상대방은 나중에 '보고' 한 번 해보라고 했다.
"파워포인트 말이야~ 니가 지금 한 얘기 정리해서 파워포인트로 보고 하라고".
그러나 여기에는 무서운 진실이 숨어있다. 정리되지 않은 내용을 끊임없이 대화하며 거기에서 숨어있던 핵심을 함께 찾아내고, 논리의 흐름을 연결해가며 불필요한 말들을 제거해나가는 과정은 원래 대화를 통해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파워포인트는 이 과정을 애초에 제거하고 만다. 듣는 사람은 자신이 해야 할 고민의 과정을 작성자에게 떠넘기는 것이고 작성자는 함께 끌어내야 하는 것들은 오로지 혼자서 해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왜 빨리 안 가져와? 그거 한 두 세장 만드는데 무슨 시간이 그렇게 오래 걸려?"
'왜 그렇게 오래 걸리냐면요, 저 혼자서 불필요한 걸 찾아 없애고 논리적 연결 고리를 만들고, 결론까지 만들어야 하거든요.'
2000년대 후반부터 보고가 기업의 업무 효율을 떨어트리는 주범이라는 인식이 팽배해지면서 그동안 사랑받던 파워포인트가 난데없이 도마 위에 오르게 되었다.
"한 장으로 줄여, 꼭 필요한 내용만 쓰라고", "그냥 엑셀 그대로 올려놓고 보고해봐", "파워포인트 금지!", "심플하게 구체적으로 정리해봐", "그래서 뭘 하겠다는 거야? 결론이 없잖아, 결론이...", "파워포인트 만드는데 쓸데없는 시간 낭비하지 말고 텍스트로 간단히 써보라고...", "제목이 좀 더 아래로... 오케이, 폰트 키워! 어르신들 안 보여, 목차 안 들어갔잖아, 이건 별첨으로 빼고..."
그렇게 많은 경험은 나를 점점 더 파워포인트 장인의 대열로 이끌었지만 고작 이런 기술로 월급을 받는다는 사실이 부끄러워졌다.
도구의 노예가 되지 말자
많은 사람들은 이제 파워포인트 없이 일하는 것이 어려워졌다. 십수 년 전 컨설턴트 Savvy 형 누나들의 작품들을 보며 자란 사람들은 이제 일부는 임원이 되었고 일부는 팀장이 되었다. 그 들은 이제 파워포인트 없이 의사 결정을 내리기 어렵다. 손정의 회장이 마윈과 베이징 오피스에서 6 분간 사업 계획을 설명듣고 그 자리에서 3천만 달러의 투자 결정을 했다는 일화는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준다. 물론 베이징에 가기 전에 파워포인트를 사전 검토했는지는 나로서는 알 수가 없다.
파워포인트는 우리에게 생각할 수 있는 힘과 토론의 능력을 퇴화시킨다. 화이트보드를 앞에 두고 힘겹게 머리를 헤집으며 통찰력을 최대한 끌어내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만들어온 슬라이드에 갇혀 의사 결정을 해나간다.
Stakeholder가 많은 경우 소위 '리뷰'라는 과정을 거치면서 누군가 다칠 수 있는 내용, 어르신의 심기를 건드릴 수 있는 내용, 발표자 자신이 곤경에 빠질만한 내용, 귀찮아질 내용들은 물론 철저히 제거된다.
우리는 이것을 그라인딩(Grinding)한다고 표현했다.
실리콘밸리는 뭐 달라?
한국의 기업 문화와 비교했을 때 그다지 크게 다르지는 않다.
스티브 잡스 스타일이 어느 정도 대중화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파워포인트는 이 곳 실리콘밸리에서도 파워풀하다. 투자자에게 제공되는 investor deck 역시 대부분 파워포인트이고 제품이나 서비스 소개 역시 파워포인트로 제공해 주면 편하다. 빈 손으로 와서 화이트보드에 그림 그려가며 설명하는 경우는 아무리 속으로는 '오 이 분 혁신적인데' 하고 싶어도 뭔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인상을 받는다.
그렇지만 내가 느낀 차이는 정말 '포인트'를 짚어주는 '파워풀'한 용도로 주로 쓰인다는 것이다.
실리콘밸리의 직장인들은 한국에 비해 여전히 말로 소통하는 것이 훨씬 많다. 회의보다 서로의 자리에 찾아가서, 커피를 마시면서, 점심을 함께 하며 끊임없이 대화를 주고받는다. 이 과정에서 설명, 주장, 질문, 아이디어, 조언이 서로 뒤섞이면서 나와 상대방의 생각을 수정해 나간다. 조잡한 과학 상자를 가지고 설명서대로 장난감을 조립하는게 아니라 넓은 백사장에서 모래성을 만드는 느낌이다.
그래서 스타트업이 "나 너에게 우리 제품 설명해주고 싶어"라고 하는데 "일단 파워포인트 자료 있지? 그거 먼저 보내봐, 한 번 보고 연락할게"라고 하는 건 최소한 이곳에서 적절하지 않다.
한국의 대기업은 이런 게 익숙하니 당연하다 생각하지만 스타트업들에게는 매우 당황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