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별
“여기 내 말 좀 들어보시겠습니까. 아니 여간 혈색이 좋고 영롱하신 게 아닙니다. 게다가 풍기는 기운이 범상치 못한 게 장차 큰일도 하시겠습니다. 그 기운 살펴보면 만사가 형통이고, 영웅이면 호걸이고, 도랑 치면 가재 잡고, 꿩 먹으면 알도 먹고, 님도 보고 뽕도 따고, 귀인도 이런 귀인이 안 계십니다. 그런데 이걸 으쩌나. 식복이 막힌 거라. 발복 할 기운이 목구멍에서 턱 하고 막힌 게, 이거 이걸 빨리 뚫어줘야 하는데”
“됐고요. 저 바빠요”
“그러지 마시고, 저희 오픈했습니다. 한 병 공짜! 저희가 직접 만든 술이지 않겠습니까. 제목이 서울의 별입니다. 시음이라도 해보시죠”
그건 이상하고 기묘한 상황이었어. 서촌 한복판이었음에도 현실적이지 않았지. 키도 손도 얼굴도 모든 게 다 큰 것만 같은 험상궂은 아저씨와 그에 반해 너무나도 앙증맞은 술잔. 게다가 서울의 별이라니. 그 괴리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지. 그러자 그 아저씨도 같이 웃어보는데 그건 미소라기보다는 험상궂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것 같았어. 그런데 낯설지 않고 서글서글해 보였지. 익숙한 인상이라는 생각 중에 잔을 받았어. 뭐에 홀린 것처럼 너무 자연스러웠던 거야. 그 일련의 과정들이. 하지만 마실 생각까지는 전혀 없었단 말이야. 그런데 그 앙증맞은 잔에서 반짝이는 일렁임을 본 거야. 그 아름다움에 나는 홀린 듯 한 모금을 들이킨 거지. 그리고 바다에 빠지고 만 거야.
암전. 서촌의 모든 불빛은 꺼지고 암흑이 펼쳐졌어. 주변은 쥐 죽은 듯 고요해졌지. 나는 너무 무서워서 도와달라고 소리쳤어. 그런데 내 목소리는 잠겨서 울리지 못했어. 그리고 시간이 지나며 숨이 서서히 차던 거야. 그제야 알아차렸지. 내가 실은 바다에 빠졌다는 걸. 방금까지만 해도 서촌 거리였던 공간감은 전후좌우를 잃고, 중력마저 모호해졌어. 내가 할 수 있는 건 허우적거리는 것뿐. 나는 최후를 예감했고, 공포에 울음이 터졌지. 그런데 커다란 손이 나를 훅하고 채가는 거야.
“자 내 손 잡으시오!”
고요한 수평선. 그 사이로 정확히 나뉜 바다와 하늘. 하늘에는 수많은 별이 있었고, 바다에도 딱 그만큼의 별이 있었지. 둘은 아주 같은 것이었어. 오로지 작은 물결로 둘을 구별할 수 있었지. 나는 그 물결 위 돛단배에서 깨어났어. 그리고 그 험상궂은 아저씨는 뭐가 그리 재밌는지 아까부터 혼자 신나서 웃고 있었지.
“이제야 일어나셨습니까! ㅋㅋㅋ 그러니까 모르는 사람이 주는 술을 덥석덥석 마시면 이 꼴이 난단 말입니다. 아가씨는 오늘 운이 아주 좋은 줄 아십시오.”
그 험상궂은 아저씨는 노를 들고 그 큰 몸을 뒤뚱뒤뚱 대더니 나와 마주 앉았어. 그리고는 예쁜잔에 바다를 담아 나에게 권했지. 맑고 투명한 액체. 아까 봤던 일렁임. 그제야 알 수 있었어 그 반짝이는 은하수를. 꿈만 같은 장면에 나는 어안이 벙벙했지. 그때 험상궂은 아저씨는 머그컵을 들더니 잔을 권했어.
“밤이 짧은데 망설여야 되겠습니까. 오늘따라 서촌 밤이 좋으니 그 맛이 기막힙니다. 내가 찬찬히 알려줄 테니 일단 한잔하시지요.”
험상궂은 아저씨는 술잔에 코를 박고 킁킁대더니 단번에 들이켰어. 그리고 아주 만족스럽다는 듯 껄껄대고 웃는데 그 모든 장면은 내게 비현실적이었지. 정말 꿈을 꾸는듯했어.
“소개가 늦었습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이 서촌 사는 도깨비로서, 옛적에는 서촌도깨비라고 대접도 받고 유명하기도 했습니다. 특기라면 사자후에 변신술 같은 게 있는데 그걸로 술 먹고 행패 부리는 놈, 객기 부리는 놈, 끼 부리는 놈, 여타 술 먹고 인사불성 안하무인 진상들 골탕 놓기가 업이지요. 이것이 실로 옛적부터 내려오고 물려오기를 이놈에서 저놈으로 저놈에서 이놈으로 타고 내려 꼬박 여든일곱 깨비들을 거치고야 내 순번에 이르렀단 말입니다. 원래는 한성에서 술 잣 짓던 장인 원혼부터가 시작이라던데, 이제야 그런 양반이 있기나 합디까. 그래서 나는 그저 술 잘 먹고 죽었단 사유로 이렇게 뽑혀서 최근에야 서촌도깨비라고 감투 하나 쓰게 된 거지요.”
“저 나쁜 짓 한 거 없는데요”
“내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귀인이시라고. 그런 분을 뵈옵는데 좋은 술 한번 대접해야지 않습니까! 큰일 없을 테니 걱정 마세요”
자기가 도깨비라는 미친 아저씨는 뭐가 재밌는지 입술을 실룩실룩 대는 거야. 험상궂지만 서글서글한 인상. 나는 여전히 망설인 채 술잔을 만지작거리기만 했지. 그때였어. 밤하늘에서 유성우가 쏟아지기 시작한 게. 빨주노초파남보 긴 꼬리를 가진 유성들이 비처럼 바다에 쏟아졌지. 그 환상의 순간. 이건 꿈일 거야. 그래, 만약 꿈이라면.
“이미 꿈이라면”
“옳거니, 이미 꿈이라면!”
서서히 잔을 들어 입술에 가까워질수록, 주변의 별빛이 하나둘 사라졌지. 하지만 그럴수록 잔 속 은하수는 더욱 반짝이는 거야. 마침내 입술에 닿는 순간. 모든 순간은 어두워지고, 오로지 잔 속 은하수만이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어. 그리고 그 빛을 들이키자 나는 다시 고요한 암흑으로 빠져 든 거야.
“우리 딸내미. 더 크면 그때 줄게. 대신 다른 사람 말고 꼭 아빠랑 마시는 거다. 약속!”
“알겠어. 약속”
“아 그리고 딸! 엄마한테는 비밀이다. 알지?”
“응 그것도 약속”
입술에서 떨어지는 술잔. 눈을 뜨자 다시 펼쳐진 밤하늘의 별들. 나는 다시 깨어난 걸까. 아니면 다시 꿈을 꾸는 걸까. 순간인 듯 영원했던 그 첫 잔. 그 너머로 미친 도깨비 아저씨는 여전히 입술을 실룩거리고 있었어. 하지만 더 이상 험상궂게 보이진 않았지. 오랜만에 만난 것 같은 그 익숙함. 나도 그제야 활짝 웃을 수 있었지.
“서울의 별, 술맛은 어떻습디까?
“너무 맛있어요. 고기보다 과자보다 콜라보다 훨씬 맛있어요”
“그럼 더 마셔보실까요?”
“네, 가득 채워 주세요!”
돛단배는 바다에 떠오른 은하수를 따라 천천히 움직였어. 물결이 부서질 때면 별들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지. 마치 수천 개의 풍경소리 같았어. 그리고 다시 바다에 별이 떠오르면 나는 잔뜩 잔을 채웠지. 무슨 얘기를 했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그 도깨비 아저씨는 나를 웃기게 해 줬어. 난, 마치 유년 시절의 꼬마처럼 웃음을 멈출 수 없었지. 우리 둘은 웃고, 울고, 장난치고, 싸우고, 다시 화해하고. 그 술자리는 십 초처럼 짧았지만 십 년만큼 길기도 했지.
“자 그럼 막잔 하십시다”
“벌써요? 한창 재밌는데”
“벌써는 무슨 새벽이 넘었는데, 내가 저기다 모셔 드릴 테니까.”
무슨 일인지 돛단배 아래로 우리 집 지붕이 잠겨있었어. 그제야 보았지 바다 아래 잠긴 서울을. 그 많던 별들은 밤사이 셀 수 없이 바다로 떨어져 서울의 별이 되고 있던 거야. 그중 영롱한 별빛이 우리 집 창문에서도 유독 반짝이고 있었어. 나는 아쉽지만, 마지막 잔을 들어야 했지.
“다행하게도 저는 인천 앞바다가 아니라 집까지 바래다주셨네요 ㅎㅎ”
“아, 그 친구는 정신 좀 차려야 했거든. 어때 술은 좀 괜찮았습니까? 이 정도면 장사 잘되겠지요?”
“최고였어요! 정말 맛있는 술이에요. 혹시 다시 맛볼 수 있을까요?
“그렇게 안 된다는 건 이미 알고 있잖습니까. 자 마지막 잔을 드십시다. 눈을 뜨면 아침일 겁니다”
“감사했어요. 모든 부분에서”
“마찬가집니다.”
들이키는 술잔. 돛단배는 서서히 침몰하고 바다가 차오르기 시작했어. 내 몸이 바다에 빠져들수록 남아있던 밤하늘의 별들도 서서히 그 불빛이 지워지기 시작했지. 귀까지 물에 잠기자 나는 깊은 잠에 빠져들기 시작했어. 여전히 실룩대는 도깨비 아저씨의 미소. 파도 때문일까. 눈앞에 그 미소는 번져있었지. 그리고 마지막 숨과 함께 잠에 빠지게 된 거야.
다음 날. 점심이 되고서야 일어날 수 있었어. 몰려오는 숙취. 머리는 깨질 것 같았지. 다행히 들어오긴 했네. 핸드폰에는 알 수 없는 전화번호 몇 개와 수많은 엄마의 부재중 통화. 그중 선배의 문자도 있었어. ‘야 어제 잘 들어갔어?’ 나는 한참 머리를 쥐고 있다 답장을 했어. ‘ㅇㅇ’, ‘선배 나도 이제 사연이 생긴 것 같네요’ 그리고 얼마 있어 보내온 선배의 엄지 척 이모티콘. 나는 다시 침대에 누웠어. 이번 달 들어온 알바비로는 로열 살루트를 한 병 사보려고. 노랗고 붉은 빛깔. 확인해 볼 게 있어. 이번에는 틀림없이 다를 것 같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