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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더락 Feb 14. 2020

아직 집에는 가지 않을래요

미세하게 빗나간 각도는, 생각보다 커진다.

2020 현대문학상 수상소설집.

아직 집에는 가지 않을래요.


 아직 집에 가고 싶지 않다면, 어디로 가고 싶은 걸까. 어쩌면 집이 아닌 어디든 상관없으니 다른 곳에 들르자는 말일까. 제목을 보고 여러 생각을 하다 책을 사야겠다고 다짐했다. 2020 現代文學賞 수상작인 『아직 집에는 가지 않을래요』는 3인칭 시점으로 주인공 희주의 심리묘사를 전개해나간다. 희주라는 이름은 작중 친구 한나의 얘기 이후로 단 한 번도 언급되지 않고, 항상 ‘그녀’로 묘사된다. 남편과 희주는 당신이라는 표현을 제외하고는, 서로의 이름을 부르면서 대화를 나누진 않는다. 도리어 한나의 이름만이 소설에서 자주 등장한다. 왜 작가는 주인공이 아닌 조연의 이름을 훨씬 더 자주 언급했을까? 이를 통해서 무엇을 시사하고 싶었을까?


《그녀와 남편은 대화를 주고받았다. 그들이 살고 있는 아파트 단지 인근의 단독 주택들 중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붉은 지붕의 집에서 그들이 사는 삶을 함께 공상하기. 그 집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언제부터인지 대화할 거리가 줄어든 남편에게 그녀가 말을 거는 한 가지 방법이었다.》


 소설에 등장하는 ‘붉은 지붕의 집’은 존재, 붕괴, 비-존재의 과정을 거친다. 붉은 지붕의 집은 희주에게 남편과 망상이지만 행복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매개체 역할을 한다. 희주가 이것을 얘기하는 이유는, 남편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겠다는 마음도 있지만, 자신이 처한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더 크기 때문이다. 희주는 매일 아침 둘째 아이와 첫째 아이를 챙겨야 하고, 핸드백 안에 유축기를 챙겨 다녀야 한다. 또한, 아이들과 씨름을 하느라 며칠이 지났는지도 모르고, 새로운 부재중 메시지를 볼 때에야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지났음을 인식한다. 희주의 현실은, 수유해야 한다는 사실 때문에 와인 잔도 들지 못하지만, 붉은 지붕의 집을 얘기할 때는 맥주와 고기를 먹을 수 있다. 그런 희주에게 붉은 집이 이사 갈 것 같다는 소식은, 어쩌면 희망이었을지도 모른다.

 정작 남편의 대답은 그 집으로 이사 가자는 말이 아닌 “그래?”라는 시큰둥한 대답이 끝이다. 희주의 남편은 희주의 표현대로, 여느 남편들보다는 훨씬 가정적인 사람이다. 희주와 대조적으로 남편은 희주라는 인간에 관한 관심을 표하진 않는다. 어떤 얘기를 나누려는 시도보다는 희주의 말에 적절한 답을 찾아서 응답해주는 기계와 같은 느낌이다. 희주에게 붉은 지붕의 집이 부서지고 있다는 사실은 자신이 가진 망상과도 같은 희망을 그만두어야 한다는 선고였다. 남편에게 붉은 지붕의 집이 부서진다는 소식은, 자신의 그릇을 싱크대에 두고 치워야 한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린 것처럼, 별것 아닌 소식이었다. 여기서 남편은 “집을 부수고 있었어”라는 희주의 말에 한 번 더 “그래?”라고 답한다. 희주는 이 순간 알았을 것이다. 붉은 지붕의 집으로 행복한 가정의 모습을 꿈꿨던 것은 이 집에서 자신뿐이었다는 걸.

 희주가 한나의 가게 카페 뮐러에서 만난 한나의 후배가 하는 공연을 혼자 보러 가고 싶어 했던 마음과, 붉은 지붕의 집 공사 현장 안의 젊고 군살이 전혀 없는 근육질의 남자에게 성적인 충동을 느꼈다는 사실이 말해주는 것은, 희주가 아직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싶은 마음을 가슴속에 가지고 있다는 걸 말해준다. 희주가 어릴 때 엄마로부터 받은 사랑은, 분명 존재했다. 매일 희주의 방을 청소했고, 계절마다 제철 채소를 사다가 국을 끓여주었고, 희주가 조금이라도 아프면 모든 일을 제쳐두고 병원에 데리고 갔으니까. 하지만 희주의 엄마는 자신의 오빠만 학원에 보냈고, 희주의 재수를 반대했고, 희주가 첫째 아이를 낳았을 때는 언제 직장을 그만둘 거냐고 물었다. 희주가 엄마의 모습을 회상할 때 “어깨에 닿는 파마머리를 하나로 묶고 빨래를 삶거나 화장실의 타일을 수세미로 닦는”이라고 말하는데, 엄마는 무슨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 아니라, 여자는 어떻게 해야 하고 남자는 어떻게 해야 하고를 잘 지키는 엄마일 뿐이었다. 과거에도, 지금도 희주는 그 누군가에게 사랑이라는 것을 받은 적이 없었다.


《그는 틀림없이 욕망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목숨을 걸어봤겠지? 불현듯 그녀는 자신이 지금껏 누구에게도 떼쓰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일찍 철이 든 척했지만, 그녀의 삶은 그저 거대한 체념에 불과했음을.》


 그래서 희주는 자신이 느낀 감정을 스스로 무엇이라 정의하지 않고, 한나가 영화 「카페 뮐러」를 보고 “사랑이 아니지. 그런 게 어떻게 사랑이야”라고 한 말을 생각하며 자신은 사랑을 모른다고 말한다. 붉은 지붕의 집이 이젠 존재하지 않는 소설의 마지막에 희주는 어떤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남편은 말수가 적어진 희주에게 “이제 그 집 완전히 다 부서졌더라”라고 말하지만, 희주는 “이젠 상관없어”라고 말한다. 희주에게 상관없는 것은 집이 무너진 사실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리라. 희주는 자신이 그렇게 말하면서 고통과 기쁨이 자신 안에 차오르는 걸 느꼈고, 둘째 아이는 한순간이지만 엄마가 자신을 완벽히 잊을 수 있음을 알아버렸고, 그런 엄마의 평상시와는 다른 아름다움이 낯설어 갑자기 울어버린다. 희주에게 상관 없어진 것은, 사랑인지 아닌지조차도 모르는 남편과 가족에게 헌신해야 한다는 만들어진 이미지일지도 모른다. 이 순간 미세하게 어긋난 그들의 삶의 각도가, 후에는 상상치도 못할 정도로 벌어질 것이니까.

 

 작중 한나는 희주가 말하듯, ‘하고 싶은 일이 언제나 너무 많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한나는 자신이 하고 싶은 파인 다이닝 요리를 배우기 위해 계획도 없이 회사를 그만두고 이탈리아로 갔다가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래서 한나는 한나이지만, 희주는 그녀이다. 작중 희주는 계속해서 전통적으로 만들어진 여자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작품의 제목이 “아직 집에 가지 않을래요”인 이유는, 전통적으로 집이라는 공간은 여자의 역할을 나누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남자를 흔히 바깥사람이라 부르고, 여자를 안 사람이라 부르는 것이 적절한 예시가 될 수 있으리라.

 백수린 작가의 이번 소설은 다분히 의도적인 장치들로 하고 싶은 얘기를 진행해 나간다. 그래서 소설의 내용이 좀 뻔하기도 하지만, 그것을 해석해나가는 과정이 나름 재밌다. 약 5년 동안 세계적으로 전통적인 여성의 삶의 잘못을 지적하고 해방 및 해체로 나아가고자 하는 걸 알 수 있다. 소설 마지막에 나온 말처럼, 지금은 미세한 각도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크게 변한 것이 없고, 어제와 다를 바가 없을지도 모른다. 미세한 각도를 가진 두 변의 길이가 길어지면 질수록 크레셴도의 형태를 보여주듯, 우리의 세계도 그렇게 나아가지 않을까 감히 짐작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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