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욕탕은 건강과 정신 건강에 좋습니다. 정말로요!
부산대학교 역 근처에 자취하던 시절, 매주 토요일 아침 6시는 목욕하러 가는 날이었다. 샴푸, 물비누, 치약, 쉐이빙 폼, 스킨, 로션, 바디 로션이 모두 준비된 허심청을 갈 때 내가 챙길 것은 칫솔과 면도기 뿐이었다. 1년 6개월 중 가장 기억에 남은 목욕탕 가는 길은 2019년 3월 30일이다. 아직은 어스름한 아침, 회색 후드티와 반바지를 입고, 슬리퍼를 신은 다음 밖으로 나갔다. 부산대역에서 온천장으로 걸어가는 길에 담배를 한 개비만 달라고 부탁하는 노숙자 아저씨를 만났다. 담배를 태우지 않아, 죄송하다고 고개만 숙이고 길을 지나쳤다. 늘 26도를 유지하는 방에서의 밤은 따뜻하지만, 아저씨의 밤은 아직도 겨울이었다는 걸 보여주듯, 벚꽃이 폈음에도 두꺼운 패딩을 입고 있었다. 아저씨는 고맙다고 말하며 패딩에서 소주를 꺼내며 담배를 안주 삼아 목을 적셨다.
온천천 옆의 윗길로 걸어가면, 작은 벚나무들이 자신도 벚꽃을 가졌다는 걸 자랑이라도 하듯 나를 맞이해줬다. 그들의 손인사를 뒤로하고, 신호등을 하나 건넌 뒤, 온천천 스타벅스로 향하면, 훨씬 더 큰 벚나무들이 나에게 인사를 건넨다. 인사 덕분에, 올해도 어김없이 버스커버스커의 "벚꽃엔딩"을 흥얼거리며 신호등을 하나 더 건너 온천장 시장으로 들어간다. 온천장 시장에 들어가면 해보다 빠르게 아침을 준비하는 사람을 볼 수 있다. 언제 문을 열었는지 알 수 없는 국밥집에는, 인부들이 식사를 즐기는 중이고, 영주상회의 할아버지는 가게 문을 열며 안에 있던 채소를 밖으로 꺼냈다. 부지런한 사람을 지나 목욕탕으로 걸어가면 25세의 나는, 미래의 행복을 지금 앞당겨 쓰는 중인가 하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것은 미래의 나의 고민이겠거니 하며 편의점에서 초콜릿 우유를 사고 다시 목욕탕으로 걸어갔다.
시장에서 걸어가면 허심청 옆문으로 들어가는 것이 가장 편한데, 그곳으로 들어가면 바로 에스컬레이터를 탈 수 있다. 타고 올라가면서 오늘 아침에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1000번 대 사물함을 쓸 수 있길 기도한다. 일반적인 목욕탕의 사물함은 세로로 긴 사물함을 2등분 해서 위에는 홀수 번호, 아래에는 짝수 번호가 적혀있다. 하지만 1000번 대 사물함은 2등분 된 것이 아니라 하나여서 정말 크게 사물함을 쓸 수 있다. 짐은 하나도 없지만, 뭔가 그 사물함을 쓰면 10,000원을 내고 VIP 회원이 된 느낌이라 기분이 좋다. 오늘 받은 번호는 1021번. 덕분에 목욕하기도 전에 기분이 좋아졌고, 신발을 넣은 다음 1021번으로 걸어간다. 사물함에 옷을 예쁘게 걸고, 안경과 휴대폰을 윗 공간에 둔다. 이후 칫솔, 면도기, 초콜릿 우유, 그리고 수건 하나를 챙긴 다음 탕으로 들어간다.
'불금 다음 날 토요일 새벽 6시에 목욕탕에 가는 젊은 이는 당신밖에 없어요'라는 걸 말해주기라도 하듯, 목욕탕에 20대는 한 명도 없다. 가장 큰 중앙 온탕에 보이는 할아버지 2명, 머리를 감고 있는 아저씨 한 명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어서 목욕탕 스피커에 흘러나오는 재즈 음악이 명확하게 들렸다. 머리를 감고, 몸을 씻은 다음 먼저 중앙 온탕에 들어간다. 정말 40도 인지는 모르겠지만 40도라 적힌 욕탕 온도를 슬쩍 본 다음, 몸에 힘을 쭉 뺀다. 온탕 가장자리의 돌에 수건을 깔고 머리를 기대면 몸이 쭉 펴져서 허리가 무척 시원해진다. 그 상태에서 눈을 뜨면, 돔 형식 천장의 하늘색이 점점 밝아지는 걸 볼 수 있다. 남색에서 파란색으로, 파란색에서 하늘색으로 바뀌는 과정은 느리면서도 빨라, 제대로 음미해야 한다. 2019년 3월 30일의 하늘은 다시 보기가 안 되니까.
온탕에서 몸을 일으켜 수건, 칫솔, 면도기, 초콜릿 우유를 챙기고 야외로 걸음을 옮긴다. 지금은 허심청 남탕 야외가 보이는 높이의 건물이 생겨서 나무 가림막을 눕혀 천장을 적당히 막아뒀다. 당시엔 없어서 하늘을 보며 온천을 즐기는 것이 가능했는데, 따뜻한 몸과 시원한 공기가 만나면 말로 표현하기 힘든 느낌이 온몸을 감돈다. 41도의 탕에 들어가 하늘을 보며 생각한다. 인도 불교철학 강사님 말이 옳았다. 현실과 천국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면 분별지이고 세속의 종교라고 하시면서, 무분별지, 그러니까 지금 자기가 서 있는 곳이 천국이라 생각하면 승의의 종교로 나아가는 것이다. 야외 온천에 있는 지금 나는 천국에 있다. 이 정도의 행복을 어디서 누리겠는가. 탕에서 나와 옆에 배치된 의자에 앉아 멍하니 초콜릿 우유를 마신다. 19학번 새내기는 내가 H사 초콜릿 우유를 마시는 걸 보고는 "선배, 정말 초콜릿 우유 마실 줄 모르네요. H사보다는 N사가 훨씬 맛있죠"라고 말했다. N사가 맛있는 건 사실이었다. 어릴 때 학교에서 나눠주는 부산우유를 받으면 꼭 가루를 넣어 흔든 다음 마시곤 했으니까. 하지만 N사 가루를 대략 6년은 먹었는데, 더 먹어야겠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목욕탕 하면 당연히 단지에 든 바나나 우유를 떠올리는 사람이 많겠지만, 나에게는 초콜릿 우유인 이유가 있다. 정말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목욕탕에서 지독하게 초콜릿 우유를 마시는 이유는, 어릴 적 할아버지가 집 근처 대림탕에 갈 때 항상 초콜릿 우유를 사줬기 때문이다. 2012년까지는 늘 할아버지와 일요일 아침 10시에 목욕탕을 같이 갔다. 대림탕은 허심청에 비하면 참 작은 목욕탕인데, 냉탕, 온탕, 열탕, 사우나 방이 끝인 곳이었다. 할아버지와 들어가면 이발하시는 걸 기다렸다가, 탕에 들어가서 몸을 불리고, '남자는 온탕이 아니라 열탕에 들어가야지'라고 하는 할아버지의 등쌀을 못 이겨 열탕에 잠시 앉는다. 이후 초콜릿 우유를 마시고, 목욕 타월에 비누를 잘 비빈 다음, 반듯이 접어 몸을 닦는다. 그러고 목욕탕을 나오면 딱 11시 20분인데, 집으로 가기 전 대림반점에 들려 짜장면을 먹는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다음에는, 누군가 당연하게 초콜릿 우유를 사주진 않았다. 그래서 나만의 방식으로 할아버지를 기억하기 위해 항상 초콜릿 우유를 사들고 목욕탕에 갔다.
야외에 앉아서 후배님의 말을 생각하다, 다음에는 N사의 초콜릿 우유를 마셔야겠다고 생각한 다음 물건들을 챙겨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2014년, 학교에 입학한 다음 처음 자취를 했을 때, 강원도에서 온 룸메이트와 허심청에 왔다가 한참을 웃은 날이 있었다. 허심청에는 '철학탕'이라는 곳이 있는데, 그 안에는 못 생긴 얼굴이, 누가 봐도 소크라테스가 아닐까 싶은 석상의 입에서 물이 줄줄 나온다. 살아서도 말 많이 한 양반이 죽어서도 입으로 저렇게 뱉어낸다면서 서로 낄낄댔다. 그때 이후로 허심청에 올 때는 꼭 철학탕에 앉아서 이때까지 배웠던 것을 나름대로 복기했다. 법철학은 난민과 여성 얘기를 중심으로 진행됐다. 우리가 외면했던 것을 마주하는 순간 피하고 싶은 감정이 든다면 자기 존재가 수치스럽다는 말이다. 2019년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기 손에 가진 것이 많아서, 그것을 놓고 다른 사람의 손을 잡기를 주저하거나 거부한다. '사회적인 이미지'라는 것이 중요해서 자신의 입장을 제대로 표현하지 않고, 자신이 페미니스트라고 말하는 사람에게 손가락질한다. 맹자가 "수치스러운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라고 했던 말과 엮어 생각하면, 현대 사회에 사람은 몇 명이나 있을까. 하지만 맹자는 선결문제 요구의 오류를 범했으니까, 이건 딱히 타당한 생각은 아니겠지. 사람들은 왜 자신이 쥐고 있는 걸 내려놓기 힘든 걸까. 그것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임에도 눈에 보이듯 행동하는 이유는 뭘까.
아침 먹고 도서관에 가야겠다 다짐하며 철학탕에서 일어나 몸을 씻으러 간다. 저번 주에 때를 밀어서 오늘은 면도와 비누칠만 하면 된다. 쉐이빙 폼을 살짝 한 번 누르고 인중과 턱에 곱게 펴 바르고, 면도기를 따뜻한 물에 불려둔다. 다니엘 헤니가 이렇게 하면 잘 된다고 해서, 따라 하는 중인데, 생각보다 면도할 때 느낌이 훨씬 좋다. 따뜻한 물에 불린 면도기로 왼쪽 한 번, 오른쪽 한 번, 입술 아래에 한 번, 인중 오른쪽 한 번, 왼쪽 한 번하면 1시간 전 백수였던 나도 말끔한 청년이 된다. 얼굴을 한 번 씻고 다시 샴푸로 머리를 감고 몸을 씻은 다음 타월을 던지고 양치를 한다. 2018년 6월, 살면서 처음으로 스케일링을 한 다음 최대한 3분을 지키려고 한다. 대충 닦는 것이 아니라 이 구석구석을 닦아 충치가 다 사라지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양치질을 한다. 입을 헹구고 나가기 전 20초 정도 냉탕에 발을 담근다. SNS에서 의사가 차가운 물에 발을 담그면, 그렇게 건강에 좋다는 얘기를 얼핏 봤다. 시험 기간이 끝나면 돌아올 것을 기약하며 탕 밖으로 나간다.
수건 하나로 몸을 다 닦은 나음, 스킨과 로션, 바디로션을 바른다. 이후 매직을 한 덕분에 찰랑 거리는 머리를 드라이기 냉풍으로 천천히 말린다. 1분 정도 냉풍으로 말린 이후 따뜻한 바람으로 바꾸고, 남은 손으로 머리를 오른쪽으로 넘겼다가 마지막에 왼쪽으로 넘기면 내가 가장 좋아하는 헤어 스타일이 완성된다. 몸에 은은하게 나는 물비누 향과 남자 스킨 향을 즐기며 옷을 갈아 입고 허심청을 떠난다.
7시 40분. 해는 이미 윤산을 넘어 하늘의 주인이 됐고, 거리에 사람들도 북적인다. 그들 속에 묻혀 느린 걸음으로 부산대 역을 향해 간다. 휘파람으로 "꽃송이가"를 부르다, 머리에 벚꽃 하나가 툭 떨어졌다. '진짜 이 정도로 행복한 하루의 시작이 있었나?' 싶은 마음에 집으로 가면서 기도를 했다. 지금 내가 느끼는 기분보다 훨씬 더 좋은 기분을 다른 이들도 느낄 수 있게 해 주십시오. 그래서 사람들이 자기 손에 쥔 것을 내려놓고 다른 이의 손을 잡을 때, 더욱 웃을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나님과 부처님께 올립니다. 둘 중 한 분만 나의 목소리를 들어주면 좋겠다는 마음을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