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안락의자에 앉은 것처럼
“미술가는 자연을 소유해야 한다. 그는 완전히 숙달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고, 자연의 리듬과 함께 그 정체성을 드러내야 한다. 그러면 훗날 그 미술가는 자신만의 고유한 언어로 스스로를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근 3년 동안 카페에서 가장 많이 본 그림은 앙리 마티스의 드로잉이다. 커피를 마시며 그림을 볼 때마다 든 생각은 ‘사람들은 왜 앙리 마티스의 작품을 좋아할까?’였다. 여러 방면으로 생각해 봤지만, 마땅한 답은 나오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 또한 앙리 마티스 그림에 호감을 느끼지만, 명확한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그림을 좀 더 자세히 보기 위해 “앙리 마티스 탄생 150주년 <마티스 특별전 : 재즈와 연극>” 전시회를 다녀왔다. 좀 더 자세히 그림을 보면 내가 왜 좋아하는지를 알 수 있지 않을까 싶었고, 전시회를 두 번 보고 난 다음 조금 알게 됐다. 오늘의 글은 11월에 한 번, 2월에 한 번 다녀온 후기를 글로 담고자 한다.
아쉬운 점
이번 전시회는 삼성역 근처의 마이아트 뮤지엄에서 열렸다. 총 5개의 섹션이 있었는데, 공간이 꽤 협소하여 작은 작품들은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그래서 「섹션 3. 발레 <나이팅게일의 노래>」의 경우 약 10평 남짓한 공간 안에 당시의 복장 3벌과 30인치가 안 되는 티브이 안에 보이는 공연이 있어 아쉬웠다. 「섹션 4. 낭만주의 시와 마티스 삽화」의 경우 앉아서 아라공, 말라르메, 보들레르 등의 시인의 책 3권을 볼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 방문객 수에 비하여 책의 수가 각각 1권씩 밖에 없었던 것과, 벽에 걸린 시의 크기가 너무 작았던 것 또한 아쉬웠다. 종합하자면, 그의 탄생 150주년 기념 전시회였지만, 크기도 적고 구성도 조금 아쉬웠다.
작품들을 보고 느낀 점
전시회는 앙리 마티스의 “내가 꿈꾸는 것은 균형과 평온함의 예술, 즉 안락의자처럼 인간의 마음을 가라앉히고 진정시키는 예술이다”라는 문구로 시작한다. 전시회 티켓을 받을 때, 얻었던 지니 뮤직의 재즈 플레이리스트를 들으니 좀 더 마음이 편안해졌다. 4년 정도 전부터 ‘Chill & lofi jazz hiphop’이라는 제목을 가진 유튜브 라이브 채널이 여럿 생겨났다. 음악을 들으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집중이 잘 돼서 부제목으로 ‘Study & Work’가 있는 경우가 여럿 있다. 그런 이유에서 이번 전시의 구성 목적은 보는 사람에게 편안함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 주가 아닐까 싶었다.
「섹션 1. 오달리스크 드로잉」의 그림은 작품 제목들이 꽤 독특했다. 당시 앙리 마티스, 혹은 그 시대의 사람들이 이국적인 문화를 접하고 느낀 감정을 드러내기라도 하듯, 작품의 제목마다 아라베스크, 무샤라비에, 아프리카 타파천, 3소엽 십자가 등 타자의 문화를 명확하게 지칭하는 단어들이 적혀 있었다. 그중 이번 섹션을 상징하는 그림인 「화로와 과일그릇 앞의 오달리스크」에 관해 짧게 서술하고자 한다. 드로잉으로 그려진 그림이라 색채가 없어 수수해 보이고, 얼굴에는 표정이 없어 뭔가 슬퍼 보이기도 한다. 이와 동시에 그림을 채우는 화려한 무늬, 오달리크의 가슴과 골반을 부각하여 관능미와 화려함이 느껴졌다. 그림 속 여인의 얼굴을 보며 오달리스크의 본래 어인 이슬람 궁정의 하렘 궁녀(노예)의 허망(혹은 슬픈) 모습이 느껴졌다. 자신이 속한 공간, 그리고 자신의 존재조차 누군가에게 예속된 것에서 오는 슬픔 말이다.
“나는 항상 그림의 아름다움의 많은 부분이 예술가가 그의 한정된 매체와 투쟁을 벌이는 대서 발생한다고 믿어왔다. 가위는 연필이나 차콜로 선을 그리는 것보다 더 감각적이다. 색채를 곧장 잘라나가는 것은 조각가가 석재를 가지고 하는 일을 연상시킨다. 컷아웃은 내가 찾은 가장 단순하고 가장 직접적인 나를 표현하는 방법이다.”
「섹션 2. <재즈>와 컷아웃」은 우리가 잘 아는 그의 작품이 여럿 있었다. 가령 <블루 누드> 시리즈, 작년에 나온 양귀자 작가님의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의 표지, 「이카루스」가 이번 섹션에 있었다. 그가 컷아웃 기법으로 작품을 만든 이유는, 붓을 들 수 없는 몸이 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품을 감상하며, 붓을 들 수 없어서 가위를 들고 종이를 오려 작품을 만든 앙리 마티스라는 사람이 대단하다고 느껴졌다. 작품을 보며 조금 신기했던 작품은 「하얀 코끼리의 악몽」이었다. 다른 작품의 경우 작품을 보면 “아 작품 제목이 이것을 의미하구나”라고 바로 생각이 들었지만, 이 작품은 명확하게 잡히지 않았다. 하얀 종이가 코끼리이고 검은 종이와 빨간 종이가 악몽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보기엔, 추상적인 요소가 강했기 때문이다(참고로 도록에는 이 작품에 관하여 이렇게 적혀 있다. 마티스는 이 코끼리를 정글에서의 옛 어린 시절을 추억하는 포로가 된 코끼리라고 표현했는데, 이 책이 전쟁 중에 사람들이 가족들과 뿔뿔이 흩어져 감옥에 갇혔던 시절에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그의 고뇌는 화살처럼 그를 꿰뚫는 붉은 불꽃과도 같다고 할 수 있겠다).
“나는 언제나 인간의 얼굴에 큰 관심을 가져왔다. 나는 얼굴, 심지어 단 한 번 본 얼굴에도 꽤 놀라운 기억력을 가지고 있다. 그들을 보면서 나는 어떤 심리적인 해석도 하지 않지만, 그들의 개인적이고 심오한 표현에 감탄하고 있다.... 초상화를 그리는 내내 나를 이끄는 원동력은 얼굴을 사색하는 초기의 강렬한 인상에 달려있다.... 나는 결국 초상화의 유사성이 모델의 얼굴과 다른 얼굴들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에서 나온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 특정한 비대칭성에서 나온 말이다. 각 인물은 자신만의 리듬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은 닮은 꼴을 만들어 낸다.”
「섹션 4 낭만주의 시와 미티스 삽화」에서는 우리가 카페에서 한 번은 마주친 적 있는 거 같은 앙리 마티스의 얼굴 드로잉 작품들이 있다. 섹션 1과 같이 작품 속 인물들의 출신 지역을 명확히 말해주고 있는데, 이는 당대 낭만주의 문학 작품들이 이국적인 분위기를 추구했던 것과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마티스는 시를 "침대에서 일어난 뒤 신선한 공기로 폐를 채우는 것과 같다"라고 말했는데, 그만큼 그에게 당대의 시인들이 많은 영향을 줬으리라. 특히 피에르 르베드리의 "얼굴들"이라는 시 옆에 걸린 마티스의 얼굴에 관한 생각을 적은 글을 보면 그는 사람의 얼굴을 보고 꽤 다양한 감정을 느꼈을 것이라고 예상된다.
“나는 내 노력을 드러내려고 하지 않았고 그전에 그림들이 봄날에 밝은 즐거움을 담고 있었으면 했다. 내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아무도 모르게 말이다.”
모든 섹션을 보며 나는 34곡의 음악을 들었다. 플레이리스트에는 150곡의 노래가 있었는데, 이를 다 들으려면 꽤 오랜 시간 작은 공간에 있어야 하지 않았을까 싶다. 이어폰을 빼고 전시회장을 나가려는 순간 마주한 마티스의 글은, 나에게 꽤 강렬하게 다가왔다. 일단 나라는 인간은, 노력을 조금이라도 인정해 주는 사회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아마도 나의 부족한 능력을 노력으로라도 채우고 싶은 마음 때문인 거 같다. 그래서 마티스의 말을 보고, 짧은 나의 생애를 돌아봤다. 누군가에게 노력을 드러내기에 급급했던 부끄러운 나의 생에 속에서 타인에게 봄날의 즐거움을 준 적은 얼마나 있을까? 거의 없는 것 같다.
전체적인 후기
코로나로 인해 전시회 기간이 연장됐다. 아직 가보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꼭 가보는 것을 추천한다. 특히 도록 속에는 전시회에서 볼 수 없었던 작품에 관한, 마티스의 생각이 여럿 적혀 있어서 비싼 가격이지만 구매하는 것을 추천한다.
‘사람들은 왜 앙리 마티스의 작품을 좋아할까?’라는 질문에 관한 답변은, ‘작품 속에 앙리 마티스라는 인간보다는 즐거움이 가득하기 때문이다’로 할 수 있겠다. 단순한 드로잉부터 다양한 색감을 주는 컷아웃까지, 마티스는 우리에게 색감의 다채로움과 선의 가벼움을 통하여 복잡한 생각이 아닌, 편안함을 준다. 마치 봄날 따뜻한 볕이 드는 창가의 안락의자에 앉은 것처럼 말이다.
사진 출처 : 마이아트뮤지엄 (myartmuseum.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