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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더락 Feb 18. 2020

대구 한 마리는 14,000원

장날은 복잡합니다. 

 

 

2019년 8월 동해시 하늘. 



“야야. 장 보러 나가자.”      


 아침 6시 반. 외할머니가 장 보러 나가자는 말은, 같이 북평 장(場)에 가자는 말이다. 3일과 8일마다 열리는 북평 장은 강원도 묵호 사람과 삼척 사람이 다 모이는 장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많은 사람이 모인다(물론 다 모여도 강남역 인파人波에 비하면 잔잔한 파도다). 외할머니가 가자고 말하면 나도 모르게 긴장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외할머니 손이 커도 너무 크기 때문이다. 물론 시장에서 산 재료를 맛있는 음식으로 만들어 주시고, 나는 어떻게든 다 먹고 집으로 돌아가지만, 그래도 짐이 많은 건 사실이었다. 아침밥을 먹던 나는, 빠르게 밥그릇을 비워내고, 다녀와서 설거지하면 된다는 외할머니의 호령에 물에 담근 상태로 옷을 갈아입었다. 

 1월. 묵호는 바다 근처라 따뜻하긴 하지만 내일도 눈이 내릴 예정이며, 버스 정류장으로 내려가는 길바닥은, 녹은 눈 때문에 찰박찰박하는 소리를 만들었다. 오늘 저녁에는 고등어를 구워준다는 말에, “고등어는 11월이 제철 아닌가?”라고 말했지만, 할머니는 “먹는데 제철이 어딨노. 걍 주는 대로 먹으면 되지. 나이 먹고 아직도 입이 짧아가 되긋어?” “참. 거 고등어도 하루 이틀 무야지. 여 온 지 1주 동안 벌써 3마리는 먹었으요.”하며 정류장에서 외할머니와 저녁 메뉴를 정하다, 21-1번 버스를 탔다. 북평 시장에 도착할 때까지 외할머니는 그냥 고등어를 먹으면 된다고 몇 번이나 말씀하셨고, 나는 이번에는 대체 몇 마리나 먹고 내려갈지 생각하며 알겠다고 답했다.

 외할머니의 고향은 부산이다. 어쩌다 강원도까지 오게 됐는지 자세한 사연은 모르지만, 대구에 살던 외할아버지와 눈이 맞아 강원도에 올라와 시장에서 가게를 하셨다고 들었다. 여중을 나온 외할머니는, 우리 엄마와 외삼촌, 그리고 젊은 나이에 통풍 때문에 몸이 불편한 외할아버지를 먹여 살리고자 악착같이 일했다고 들었다. 그 돈으로 외할머니는 우리 엄마를 대학까지 보내고, 집도 사주고, 차도 사줬다. 그런 외할머니는, 외가댁에서 집에 내려가는 날에는, 나를 보고 항상 ‘우쨌든 열심히 해. 부모님이 돈 벌어다 줄 때 해야지. 난주 되면 그런 것도 읎어’라는 말을 하셨다. 마치 육체는 단명이지만, 근성은 영원한 것이라고 말한 김성모 화백의 폭룡의 시처럼, 외할머니에게 근성은 최고였다. 외할머니의 근성은 장에서 발휘되는데, 그것은 끝없는 흥정이었다. 물론 이 흥정의 기본은 외할머니의 시장 인생 50년의 짬에서 나오는 것이라, 그 누구도 거부할 수 없다. 그녀는 항상 장에서 기어코 자신이 원하는 가격에 물건을 얻어냈으며, 그걸 지켜보는 나는 ‘이게 이렇게 되나?’하며 짐을 들었다.

 “이번 정류장은 북평농협 정류장입니다. 다음 정류장은 북평 중앙사거리입니다”. 나는 벨을 눌렀고 외할머니의 손을 잡은 다음 천천히 하차했다. 장날의 사람들은 대체 언제부터 나왔을까 싶을 정도로 도로에는 봉고차, 4톤 트럭이 줄지어 있었다. 장날에 우리 외할머니는 모두의 엄마가 되기도 하고, 누님이 되기도 하고, 언니가 되기도 했다. 그렇게 한참을 걷다 등장한 생선 가게에서 외할머니는 큼직한 대구 한 마리를 잡더니 “내 여 두 바퀴만 돌고 와서 14,000원에 살 거니까 손질해놔라. 알긋제?”라고 말했다. 밑에 가격표에는 24,000원이라 적혀 있었다. 아저씨는 “엄마. 그게 말이 되는 소리예요? 14,000원은 너무했다. 18,000원에 드릴게요. 네?” “14,000원” 그렇게 으름장을 놓고 외할머니와 나는 다른 반찬거리를 사러 갔다. 

 길을 걷던 중 외할머니는 호떡을 파는 가게를 보고는, 하나 사 먹으라는 눈길로 3,000원을 지워주셨다. 대구 가격은 그렇게 깎으신 분이, 호떡을 3,000원어치나 사라니. 거기다가 이때까지 장에서 간식을 사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의아한 눈빛으로 외할머니를 보니, 외할머니는 “빨리 가서 사와! 내는 저 가서 구경 좀 하고 있을 태니께”라고 말했다. 오랜만에 호떡 먹을 생각을 하니 군침이 돌았고, 빛이 바랜 파란색 호떡 트럭에 가서 “3,000원어치만 주세요”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사장님은 알겠다는 말도, 3,000원어치는 몇 개라는 말도 없이 호떡을 구웠고, 나는 멍하니 둥그런 밀가루가 펴지고 그 안에 꿀이 들어가는 걸 바라봤다. 아저씨는 검은 비닐봉지 안의 하얀 봉투에 호떡을 5개 담은 뒤, 3,000원을 받으시고는 몸을 90도로 접어 인사하셨다. 나는 잘 먹겠다는 의미로 아저씨의 눈을 보며 먹는 시늉을 한 다음 왼손 날로 오른손 등을 쳤다. 

 봉지를 손에 끼고 외할머니에게 갔고, 외할머니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없이 걸어갔다. 장에서 우리는 대파, 쌀 10kg, 양파, 멸치, 고추, 무, 땡초 등등을 산 다음 손질 한 대구를 찾으러 갔다. 가면서 나는 정말 힘들다는 생각과 ‘과연 아저씨는 대구 손질을 했을까?’라는 생각을 동시에 했다. 우리는 대구를 찾으러 왔고, 아저씨는 말없이 대구를 주고 14,000원을 받으며 “엄마, 다음에는 좀 더 비싸게 사. 이런 경우가 어딨어”라고 볼멘소리를 냈다. 그러자 외할머니는 “대구가 헐타 아이가”라고 말한 뒤 돌아갔다. 짐이 너무 많아 집에 갈 때는 택시를 탔고, 외할머니는 저녁에 대구탕을 해주겠다고 말씀하셨다. 

 외할머니의 이런 모습 때문에, 나는 외할머니를 보러 버스를 타고 4시간 반을 오는 걸지도 모른다.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던 날, 가장 슬펐을 분이 장례식장 안에서는 눈물 한 방울 안 흘리다, 발인하는 순간에 혼자 뒤로 돌아 우시는 모습에 나는 울 수 없었다. 집에서 가장 큰 어른이라서, 외할머니는 정말 옛날 사람이라서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얘기하신 적이 없다. 그래서 나는 나이를 먹고도 혼자 외할머니를 보러 묵호에 온다. 말하시지 않는 감정을 조금이라도 이해해드리고 싶어서, 그리고 나는 당신의 말처럼 열심히 잘 사는 중이라는 걸 보여드리고자 이곳에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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