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Finland
핀란드를 여행하다 국립공원에 갔었을 때의 이야기다. 그 당시 나는 여행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터라 많은 시행착오를 겪고 있었다. 국립공원에 혼자서 아무런 준비 없이 가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짓인지 지금은 아주 잘 알고 있지만 그 당시에는 너무 무지했었다. National 'Park'라고 하니 그냥 좀 큰 공원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이 얼마나 멍청했던가. 설악산도 지리산도 모두 국립 '공원'인데 말이다.
지도를 열심히 들여다본 끝에 A포인트를 거쳐, B포인트를 찍고 돌아온다면 30km 남짓이라 8시간 정도를 걸으면 될 것 같았다. 아침 일찍부터 물 한병, 몇 개의 과일과 초코칩을 배낭에 넣고 가벼운 마음으로 길을 나섰다. 이토록 아무 생각이 없었을까. 산속을 혼자 헤맬 생각을 하다니 지금 생각해보면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A포인트에 도착할 때까지는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A포인트에 있는 산장에 들어가서 구경도 하고 방명록에 이름도 남겼다. 그 방명록은 방명록의 역할을 함과 동시에 혹시나 산속에서 사람을 잃었을 때 그 사람이 어느 루트를 거쳐갔나를 알게 해주는 역할도 하는 것 같았다.
문제는 그 이후에 일어났다. 핸드폰이 잘 터지지 않아 제대로 로딩되지 않는 지도를 방향만 보면서 B포인트로 열심히 걸어가고 있었는데, 나무로 된 높은 울타리를 만났다. 넘어가면 안 될 것 같아 빙 둘러가려고 다른 방향으로 걸었다. 그런데 이게 웬걸, A도 B도 아닌 다른 포인트에 도착해버렸다. 내가 가고자 했던 B포인트에서 많이 벗어났다는 뜻이었다. 내가 생각했던 곳과 다른 곳에 도착하다니 길을 잃은 것 같은 불안함이 엄습했다. 게다가 비가 조금씩 내리기 시작했고 날씨가 추워졌다. 낭패였다. 아까 도착했던 산장의 방명록에 글을 남겼으니 누군가가 구하러 오려나 생각도 했다.
주변을 돌아다니며 여기가 어디일까 하고 둘러보고 있던 차에 캠핑하는 부녀를 만났다. 그들은 따듯한 물로 캠핑용 식기에다가 식사를 하고 있었는데 대뜸 가서는 길을 물어보았다. 내가 원래는 B를 향해서 가고 있었는데 왜 여기가 나왔는지 모르겠다, B로 가야 하는데 어느 쪽인지 아느냐,라고. 그들은 나를 쳐다보더니 한동안 말이 없다가 식사를 마치고 일어서서는 우리가 B로 가는 길인데 함께 가겠냐고 물어왔다. 나는 당연히 예쓰를 외치고 따라나섰다.
아시아인이 어려 보인다고는 하지만 나를 얼마나 어리게 본 것일까. 그들은 내가 산에서 미아가 되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길을 잃은 건 사실이지만. 입고 있던 바람막이 잠바를 벗어서 추우면 입으라고 주고, 손을 내보라 하여 손바닥 위에 땅콩과 젤리 등의 간식을 부어주며 트래킹 할 때는 단 음식을 먹어주어야 한다고 얘기해주었다. 산에서 지도를 보는 법을 나침판과 함께 가르쳐 주고, 새나 사슴이 나오면 이름을 알려주었다. 물길을 만나면 물통에 물을 받아 넣는 모습이 프로 캠핑러 같았다.
걸으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네들은 5일 간 이 국립공원에서 캠핑을 하고 돌아가는 길이라고 했다. 딸은 의대 지망생이었는데 대학 입시를 끝내고 학교 발표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이번에 안되면 내년에 한 번 더 도전할 생각이 있다고 얘기했다. 아빠는 노키아에서 일하던 엔지니어였는데 노키아가 마이크로 소프트에 인수되면서 대대적인 인사 정리가 있었을 때 회사를 그만두고 좋아하던 총기 관련된 일을 하며 여가를 보낸다고 했다.(밀덕인 것 같았다.) 시간적 여유가 되는 사람이 둘 뿐이라 다른 가족은 남겨두고 둘만 왔다고 했다.
같이 걷다가 아까 보았던 그 나무 울타리를 다시 만났다. 역시나 처음 지나온 길이 맞았던 모양이다. 그네들은 그 울타리의 문을 열고 아무렇지 않게 지나갔다. 아, 이럴 수가. 아까 그냥 이 울타리를 넘어갔더라면 길을 잃지 않았을 텐데. 그 울타리가 무엇인지 궁금해져 물어보았더니, 순록이 넘어가지 못하게 해 둔 것이라고 했다. 여기 있는 순록들은 대부분 주인이 있다며. 그랬다. 사람은 넘어가도 상관이 없었던 것이었다. 처음 그 울타리를 보았을 때 러시아와의 국경이 아닐까 생각했었다.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된다고 생각되지만 그 당시에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그 국립공원은 러시아와 맞닿아 있기는 하다. 하지만 국경은 내가 트래킹을 시작한 곳에서는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는 아니었다.
트래킹 중에 엄청나게 많은 순록을 볼 수 있었다. 순록을 본 것은 처음이라서 너무 신기했지만 뿔이 너무 커서 눈 마주치면 무서웠다. 꽤나 오랫동안 가까운 거리에서 나와 눈을 마주치고 있던 순록이 있었는데 무서워서 카메라를 꺼낼 수가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순록도 나를 경계하고 있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우여곡절 끝에 목적지에 도착했고, B포인트는 꽤나 큰 포인트여서 숙소도 비지터 센터도 있는 곳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여기서 트래킹을 시작한다. 내가 만난 두 분도 이 곳에서 시작을 했다며, 주차를 이쪽에 했기에 이쪽으로 다시 왔다고 얘기했다. 트래킹을 시작하는 길목에는 가방의 무게를 잴 수 있는 저울이 있었는데, 막 캠핑을 끝낸 두 분도 자신들의 배낭을 걸어보더라. 가방 하나가 10kg이 넘었는데 실제로 출발할 때는 식량을 가지고 가기 때문에 15kg 가 넘었었다고 했다. (그 정도면 군장 아닌가;;) 둘은 그 포인트에서 하루 묵고 내일 집으로 출발한다고 숙소 쪽으로 걸어갔고 나는 작별의 인사를 하고 비지터 센터를 찾아갔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돌아가는 것도 걸어서 가려했건만, 길을 헤매는 바람에 몸도 마음도 지치고 시간도 빠듯할 것 같아 돌아가는 차편을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주말이라서 오후 1~2시경에 막차가 지나갔다고 했다. 핀란드의 택시비는 상상을 초월하는 터라 그 근처의 숙소를 잡는 게 나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잠시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캠핑 부녀가 다시 오더니 숙소는 있느냐고 물어보는 것이었다. 여기서 좀 떨어진 곳에 있는데 버스가 끊겨서 고민 중이라고 얘기했더니, 자기네들이 차가 있으니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오 마이갓. 이런 천사들을 보았나. 사실 산으로 걸어서 왔으니 좀 멀게 느껴졌지만 차로 가면 길도 잘 되어 있고 금방 가는 길이기는 했다. 그래도 그들의 도움이 눈물 나게 고마웠다.
차로 내 숙소에 도착했을 때 너무나 고마운 마음에 저녁이라도 대접하고 싶어 괜찮겠냐고 물어보았는데, 됐다면서 다음부터는 위험하지 않게 어른들이랑 다니라는 말을 남겨두고 떠났다. 아 이런. 정말로 미아로 봤던 거구나. 어리게 봐주셔서 고맙다고 해야 할지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복잡 미묘한 기분이었다. 어쨌든 산에서 길을 잃고 죽을 뻔했는데 살아 돌아왔다.
어쨌든 이 날 이후에 국립공원에 갈 때는 만반의 준비를 해서 간다. 배낭 안에 도시락이며 물이며 먹을 것도 많이 넣고 우비도 항상 준비해서 다닌다. 인터넷도 당연히 안될 것이라 생각하고 지도도 프린트해서 들고 다닌다. 좋은 사람들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정말 큰일 났을 뻔한 경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