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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유가 Jan 31. 2019

그리스와 터키의 국경에서

    오래 전의 일이다. 내가 처음 유럽여행을 했던 시절이었으니 아마 10년 전쯤 인 것 같다. 그때 동생과 둘이 여행을 하고 있었고 그 날은 그리스의 한 섬에서 배를 타고 터키로 넘어갈 예정이었다. 허접해 보이는 작은 선착장이었지만 그래도 국경이라고 이것저것 검사도 하고 질문도 하고 입국심사를 하더라. 크게 이상한 것은 없었고 의례적인 입국심사였다.


    터미널에 앉아서 배를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한 입국 심사관이 와서 동생을 데려갔다. 뭔가 의아해서 동생이 들어간 사무실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는데 아까 그 사람이 나와서 이번엔 나에게 왔다. 확인할 것이 있어서 그러는데 같이 가달라고.


    이상했다. 보통 영화에서 이런 말을 들으면 이상한 곳으로 끌려가곤 하던데 괜찮은 건가 싶었다. 하지만 그 사람은 친절해 보였고 나를 위협하는 것도 아니었다. 안쪽으로 들어가 보니 동생이 영어로 얘기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그래서 나를 부른 듯한 느낌이었다. 동생이 말하기를, 이 사람들이 자기 여권을 가져가서 살펴보고 있다고. 무슨 문제가 있는지 물어보았더니 아무 문제없다면서 내 여권을 좀 살펴보아도 되겠냐고 했다. 그러라고 내어 주었더니 정말 열심히도 살펴보더라. 한 장 한 장 넘겨보고, 표지를 흔들어보고, 손으로 문질문질 해보고 하면서 말이다.


    이쯤 되니 궁금해서라도 물어봐야겠더라. 무슨 일이냐고. 그 사람들은 잠시 생각하는가 싶더니 나에게 다른 한국 여권을 보여주었다. 위조 여권으로 의심되는 한국 여권을 발견해서 내 것과 대조해보고 싶었다고. 그러면서 그 여권과 내 여권의 다른 점을 열심히 설명해 주었다. 표지의 재질이 다르고 이쪽의 문양의 크기가 다르고 한다면서.


    나는 물론 위조 여권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지만 그 여권은 별 이상이 없어 보였다. 그게 정말 위조 여권이라면 정말 잘 위조한 것이리라. 나는 내 의견을 전달했다. 이 여권은 별 문제가 없어 보인다. 표지의 재질이 다른 것은 최근에 전자 여권이 새로 생겨 안에 칩이 들어 있을 수 있어 그렇다. 내것은 옛날 스타일 여권이다. 아마 새 여권은 디자인이나 문양의 위치가 조금 바뀌었을 수도 있다 라고.


    그러다 구석에서 한국어로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 그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한국인 두 명이 앉아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친 그들은 나에게 한국인이냐고 물어왔다. 내가 그렇다고 하자 한국어로 온갖 불평을 쏟아냈다. 지금 여기 잡힌 지 수 시간이 넘었다며,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거냐며, 일정이 다 꼬여서 짜증 난다며 말이다.


    그쪽으로 다가가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물어보았더니, 터키에서 배를 타고 그리스로 입국하였는데 입국 심사 중에 잡혔다고 했다. 영문도 모르고 여기 계속 앉아 있다고. 저녁에 다른 곳으로 가야 해서 오늘 하루 동안 이 섬을 둘러보고 싶었는데 다 망했다고. 얘기를 들어보니 군대 전역 후 친구랑 둘이서, 여권도 새로 만들어 여행을 하는 모양이었다. 전역한 지 얼마 안 된 것이 내 또래인 듯싶었다.


    난감했다. 내가 어떻게 해줄 수 있는 것도 없고,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경계와 의심의 눈초리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말을 주고받고 있는데 처음 나를 불렀던 오피서가 한국어로 이야기하고 있는 거냐고 물었다. 그래서 그렇다고 하며 내가 들은 이야기를 대충 영어로 설명해 주었다. 그 오피서는 알겠다며 고맙다며 나와 동생을 내보내 주었다.


    그 두 사람은 잠시 뒤에 풀려났고 울분을 참지 못한 모습으로 그곳을 떠났다. 서로에게 어떤 작별의 인사를 건네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들이 고맙다고 했던 것 같기도 하고, 내가 여행 잘하라고 했던 것 같기도 하다. 아무튼 내가 그 상황이었어도 굉장히 열 받았을 것 같다고 생각한 것은 기억에 남는다.


    우리가 탈 배가 도착하고 배를 타려고 줄을 서있는데 아까 그 오피서가 와서 정말 고맙다며 마지막 인사를 했다. 들어보니 중국인들이 한국 여권을 위조해서 배로 밀입국하는 사례가 부쩍 많아져 민감했다고 했다.


    그렇게 상황은 마무리되었고 최악의 상황까지 가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배에 올라탔다. 위조여권 해프닝이라니... 그리스를 떠나는 와중에 에피소드가 하나 생겼구나 하면서. 그리고 나는 터키로 가는 배 안에서 뱃멀미를 했다.

에피소드와 상관없는 그냥 배 사진.

    덧, 이후에 그들과 비슷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미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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