핀란드 여행을 하던 때였다. 헬싱키에서 일주일이 조금 넘는 시간을 머물고 있었을 때, 로즈를 만났다. 이름만큼이나 밝고 환한 그녀는 네덜란드에서 온 여행을 아주 좋아하고 환경문제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때 여행 이야기를 하면서 친해진 사람은 로즈뿐만이 아니었고 스위스에서 온 한나와 영국에서 온 엠마까지 셋이었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같이 어울렸고, 핀란드 물가가 너무 비싸다며 불평도 하고 저녁엔 같이 바에 술을 마시러 가기도 했다. 술을 마시고 해장을 하러 햄버거를 먹으러 가는 길에 로즈가 채식주의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핀란드에서 이것저것 같이 하기로 계획을 했지만, 갑자기 회사에서 연락이 와 나를 뉴욕으로 보내버리는 바람에 그 이후의 일정은 함께하지 못했다.
그로부터 약 1년 뒤에 로즈가 한국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오랜만이라 어색할까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로즈에게 연락을 해보았고, 로즈는 아주 반갑게 한국에 가면 한 번 만나고 싶다고 답을 주었다. 그렇게 우리는 약간 더워지기 시작할 무렵 한국에서 만났다. 우리 집은 서울에서 좀 떨어진 곳이라 여행자에게는 불편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빈 방이 있으니 며칠 지내도 좋다고 했고, 로즈는 하루 이틀 정도를 우리 집에서 있었다.
하루는 함께 서울 나들이를 했다. 로즈와 함께 다녔던 기억을 떠올려 그녀가 좋아할 만한 곳에 갔다. 유명 관광지보다는 현지를 즐기는 것을 더 좋아하는 그녀 였기에, 우선 한강공원을 산책하면서 함께 길맥을 했고, 이태원에 가서 이것저것 음식을 먹어보았다. 로즈는 채식주의자였기에 한국 음식을 추천하기가 힘들었다. 비빔밥을 고기 빼고 주문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모든 국, 탕, 찌개류는 육수가 사용되었고, 해산물도 먹지 않았기에 야채김밥도 도전할 수 없었다. (김은 채식이라 생각했지만, 해산물은 원래 좋아하지 않는다고 한다.) 게다가 매운 음식도 먹지 못해 먹을 수 있는 한국음식이 많지 않았다. 채식용 부추만두와 녹두전 따위를 먹었다. 로즈와 함께 다니면서 한국이 채식주의자들에게 얼마나 선택권이 없는 나라인가를 알게 되었다. 유럽 여행을 다녀보면 어느 식당에 가든 베지테리안 메뉴, 비건 메뉴, 글루텐 프리 메뉴 등등이 다 있는데 말이다.
그리고 며칠은 같이 전라도에 갔었다. 전주 같은 유명한 도시를 갈 수도 있었지만, 그곳은 혼자라도 갈 수 있을 것 같아서 내가 그녀를 데리고 간 곳은 담양이었다. 담양의 명물인 떡갈비를 먹지는 못했지만, 대나무로 둘러싸인 죽녹원과 메타세콰이어 길은 그간의 밀린 이야기를 하면서 함께 여행하기 참 좋았다. 죽녹원에서는 대나무를 깎아 부채를 만드는 장인을 만났는데, 로즈는 그분이 작업하시는 모습에 매력을 느낀 듯했다. 우리는 거기서 그 분과 이야기를 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부채를 만드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부채를 기념품으로 사기도 했다. 그분은 곧 담양에서 열릴 대나무 축제에 자신의 부채를 선보일 계획이라면서 아주 커다란 부채를 꺼내와 보여주셨다. 그리고는 로즈에게 그 큰 부채에 네덜란드 말로 한 마디 적어줄 것을 부탁하셨다. 로즈는 한 귀퉁이에 무언가를 적었고, 나도 네덜란드 어는 하지 못해서 무슨 뜻인지는 나중에 물어보았는데 한국 너무 좋다고 적었다고 했다.
로즈는 우리 가족들과도 한 번 만나 같이 식사를 했는데, 동생이 채식을 한 적이 있어 한국에서 채식을 할 수 있는 방법을 이것저것 알려주었다. 엄마도 외국인 손님이 기억에 남으시는지 로즈가 본국으로 돌아간 후에도 종종 이야기하곤 하셨다.
여행을 주제로 가끔 로즈와 이야기하곤 하는데 로즈는 여행 이야기를 할 때마다 항상 한국에서 좋은 기억을 만들어 주어 고맙다고 한다. 나도 덕분에 국내 여행도 하고 즐거웠는데 말이다. 혹여나 일정과 동선에 맞지 않게 내가 너무 지방으로 간 것이 아닐까, 불편하게 가족들과 밥을 먹은 것은 아닐까 싶었지만, 로즈가 그 모든 것이 좋은 추억이 되었다 해주어 고마웠다.
얼마 전에 파리에서 마주칠 수 있었는데 이틀 차이로 일정이 비껴갔다. 우리 둘 다 매우 아쉬워했었지만 서로의 일정이 있어서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로즈와 여행했던 이 기억을 꺼내어 본다. 언젠가 네덜란드에서 그녀와 다시 만날 수 있기를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