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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유가 Oct 19. 2019

꿈꾸는 책들의 도시

발터 뫼르스

이미 멀리서부터 그 도시의 냄새를 맡을 수 있다. 그것은 오래된 책들에서 나는 냄새다. 어마어마하게 큰 어느 고서점 안으로 들어가는 문을 활짝 열어젖히면 곧 책 먼지가 거세게 일어나고 그 안에 쌓여 있던 수많은 부패한 대형 서적들에서 곧바로 얼굴을 향해 불어오는 곰팡내와 비슷하다. 이런 냄새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은 냄새가 코로 스며들자마자 즉시 발길을 돌리기도 한다.
그것이 별로 기분 좋은 냄새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한다. 그 냄새는 절망스러울 정도로 케케묵은 것이고, 와해되고 해체되어 무상해지는 것, 게다가 곰팡이 균과 관련된 것이다. 그렇지만 또 거기에는 무엇인가가 있다. 약간은 레몬 향기를 연상하게 하는 시큼한 냄새가 난다. 오래된 가죽 냄새 같은 자극적인 방향이기도 하고, 코를 찌르면서도 지적인 느낌을 주는 인쇄용 검정 잉크의 향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끝에 가서는 무엇보다도 마음을 진정시키는 나무 냄새가 난다.
나는 살아 있는 나무에 대해서나 끈적끈적한 수지가 흐르는 나무숲에 대해서, 혹은 싱싱한 소나무의 침엽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이야기하는 것은 죽어서 껍질이 벗겨지고 빛이 바래고 부스러져 빻아지고 물에 적셔지고 아교가 칠해지고 압착기에 눌리고 가늘게 잘린 나무에 대한 것이다. 간단히 말해 종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부흐하임에는 공식적으로 등록된 고서점의 수만 해도 무려 오천 개가 넘었으며, 대충 짐작하기로 완전히 합법적이지는 않은 소규모 서점들의 수도 천여 개는 되었다. 그런 데서는  외에도 알코올이  음료, 담배, 향료 그리고 마약류의 약초도 팔았다. 그런 것들을 즐기면 독서열이나 집중력이 향상된다고들 했다. 온갖 형태의 인쇄물들을 작은 바퀴가 달린 서가나, 작은 차에 담거나, 아니면 등에 메는 자루나 손수레에 담아서 끌고 다니며 싸게 파는 상인들의 숫자는 이루 헤아릴 수도 없이 많았다. 또한 육백 개가 넘는 출판사들과 쉰다섯 개나 되는 인쇄소, 십여 개의 종이공장이 있었고,  활자와 인쇄용 검정 잉크의 생산에 주력하는 공장들의 수도 끊임없이 늘어났다. 수천 가지가 넘는 장서표를 파는 서점들이 있었으며,  받침대만을 전문으로 만드는 석공들이 있는가 하면, 독서대와 서가들로 가득  가구점들이 있었다.
독서용 안경과 돋보기를 만들어 파는 안경점들도 있었고 거리 모퉁이마다 찻집이 있었는데, 그곳에서는 보통 하루 이십사 시간 벽난로에 불을 피워 놓고 시인들의 작품 낭독회가 열렸다.


여기에는 바로 '꿈꾸는 책들'이 있었다. 그 도시에서는 고서적들을 그렇게 불렀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장사꾼들의 눈에는 제대로 살아 있는 것도 그렇다고 제대로 죽은 것도 아니고 그 중간인 잠에 빠져 있는 상태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책들은 사실상 과거에 존재했다가 이제는 소멸을 앞두고 있었으며, 그래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부흐하임의 모든 책 서가들과 상자들, 지하실들, 지하무덤들 속에는 그렇게 졸고 있는 책들이 백만 권, 아니 수백만 권에 달했다. 오직 무언가를 찾는 수집가의 손에 의해 어떤 책이 발견되어 그 책장이 넘겨질 때만, 그것을 구입해서 거기에서 들고나갈 때에만 그 책은 새로이 잠에서 깨어 생명을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여기에 있는 모든 책들이 꿈꾸는 것은 바로 그런 것이었다.


책의 도시 부흐하임에 대한 묘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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