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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취한하늘 Apr 22. 2022

6번 버스 안내원의 작은 친절

그때가 정확히 몇 살 때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내 생각에는 9살이나 10살 때였을 것 같다. 당시 부모님은 장사하느라 바쁘셨기 때문에 내가 밖에서 어디를 돌아다니는지 잘 모르셨다. 한 번은 밤 11시 넘어 집에 돌아갔다가, 대문이 잠겨있어 들어가지 못한 적도 있었다.


그런 시절의 어느 날에, 버스를 타고 친구 집에 놀러 갔다. 나는 일찍부터 버스를 타고 어디든 갔다가, 반대 방향으로 같은 번호의 버스를 타면 집으로 돌아온 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가끔 버스를 타고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곳에도 다녀오고는 했다. 때문에 버스를 타고 한참 가야 하는 친구의 집에 다녀오는 것은 나에게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친구네 동네에서 한참을 놀다가 저녁 무렵에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를 탔다. 아마 6번 버스였던 것 같다. 구월동에서 6번 버스를 타고 송림동 현대시장 가까운 곳에서 내려 집까지 걸어가면 되었다. 집으로부터 반경 500미터 정도 구역은 빠삭했기 때문에 그 구역에만 내리면 집을 찾아가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길은 잘 알아도 그 길에 있는 건물들의 이름은 아는 것이 많지 않았다. 아무래도 그 나이에 이용하는 건물은 문구점이나 오락실 정도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아무튼 6번 버스를 잘 타고 집으로 오고 있는데, 버스 안내원 누나가 어디까지 가느냐고 물어 왔다. 당시에는 버스에 안내원이 있을 때여서, 안내원이 표를 받고 문도 열어주던 시절이었다. 나는 아는 대로 '현대시장'으로 간다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그 누나가 '복음병원'에서 내리냐고 다시 물었다. 복음병원은 내가 내리는 정거장 바로 앞에 있는 병원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정거장에서 내리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복음병원'이라는 건물명을 내가 몰랐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 누나가 하는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고, 그냥 '현대시장'에서 내리면 된다는 말만 반복했다.


9살쯤 돼 보이는 남자아이가 '현대시장'에서 내린다고 하는데, 막상 버스는 현대시장에서 약간 떨어진 정거장에만 멈출 뿐 현대시장으로 진입하지는 않기 때문에, 아마도 그 안내원 누나는 남자아이가 걱정되었던 것 같다. 그래서 6번 버스가 주안역에 정차해 있는 동안 남자아이에게 버스비를 돌려주면서, 지금 내려서 뒤에 서있는 27번 버스를 타고 마지막까지 가면 현대시장이라고 일러주었다. 그 말을 듣고 나니 나도 버스를 잘못 탔나 싶어 안내원 누나가 시키는 대로 뒤에 서있는 27번에 가서 다시 버스비를 내고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무사히 현대시장에서 내려서 집으로 갔다.


나중에서야 내가 원래 내리려던 곳이 '복음병원'임을 알았다. 내가 그 이름을 알았다면 거기서 내리면 된다고 했으면 될 일이었다. 그 이름을 몰라서 누군가의 걱정을 사고, 버스를 갈아타는 수고를 하게 되었다. 하지만, 내가 그 일을 기억하는 건 그런 실수 때문이 아니다. 바로 그 안내원 누나의 작은 친절 때문이다.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버스 안내원의 친절은 나에게 굉장히 큰 인상을 남겼던 것 같다. 당시에는 잘 몰랐지만, 세월이 지나도 그 사건이 머릿속에 종종 떠오르는 것을 보면, 나에게 큰 영향을 준 사건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적어도 내가 받은 친절을 생각하면 늘 떠오르는 사건이 되었으니, 어쩌면 내 머릿속에서 '친절'에 대한 하나의 상징이 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리고 내가 받은 그 작은 친절이, 내가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 친절의 시작점이 되지 않았을까도 생각한다.


아이들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닐 것 같다. 내가 타인에게 하는 어떤 행동 하나가 그 사람에게는 하나의 상징으로 남을 수도 있다. 그것은 좋은 상징이 될 수도 있고, 나쁜 상징이 될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상징은 그 사람의 인생에 크고 작은 영향을 끼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말과 행동이 조심스럽다.


모든 사람에게 착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것은 좋지 않은 강박이지만, 어느 누구에게도 나쁜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다. 누군가에게 나쁜 상징을 만들어 주기보다는 좋은 상징을 만들어 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내가 받았던 그 작은 친절이 내 마음속에 심어 놓은 무언가를 나도 타인의 마음속에 심어주고 싶다. 대단한 무언가를 해서가 아니라 작은 행동 하나에도 좋은 마음을 담는 것을 통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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