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 관리인

by 취한하늘

1


순수한 어둠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시간이었다. 한밤 중의 교외 공장지대에는 사람도 차도 보이지 않았다. 어쩌다 지나가는 바람 소리가 크게 들릴 정도로, 살아있는 존재의 활동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밤이었다. 가끔 야간작업을 하는 공장이 있으면, 밤에도 환한 불빛과 시끄러운 소리가 공간을 채우고는 했지만, 지금은 모든 공장이 지독한 어둠과 침묵 속에 묻혀 있었다.

'부릉부릉'

갑자기, 어둠과 침묵을 동시에 깨는 빛과 소리가 한 지점에 모여들었다. 그 빛과 소리는 잠시 한 곳에 머물러 있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천천히 이동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그 빛은 도로를 비추고 있었고, 빛과 소리는 멀리 보이는 도심의 불빛을 향해 빠르게 사라져 갔다.

'타닥타닥'

자동차의 불빛이 사라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번에는 한 공장에서 빛과 소리가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빛은 방금 전의 빛과는 다른 빛이었다. 그 빛은 열기를 뿜어내는 빛이었다. 열기를 뿜어내는 빛은 공장 안이 답답하다는 듯이, 창문 밖으로 붉은 손을 내밀고 있었다.


잠시 후, 공장을 먹이 삼아 몸집을 불릴 대로 불린 거대한 화마가 시끄러운 울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평화롭게 잠들어있는 세상이 불만스러운 듯, 자신의 존재를 최대한으로 과시하고 있었다. 화마를 잠재우기 위해 소방관들이 애를 쓰고 있었지만, 화마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서, 공장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검은 희생물이 되어 무력하게 죽어가고 있었다.


2


사무실에는 ㄱ자 모양의 책상 하나와 6명 정도가 둘러앉을 수 있는 테이블 하나가 있었고, 테이블 주위로 몇 개의 의자가 있었다. 벽 쪽으로는 책장 두 개가 나란히 서 있었고, 한 책장의 옆에는 골프채로 채워져 있는 가방이 책장에 기대어진 채 놓여 있었다. ㄱ자 모양의 책상에는 '대표이사'라는 직함과 이름이 적혀있는 명패가 있었다. 그 뒤로 목 받침대가 있는 사무용 의자가 있었고, 그 뒤 벽에는 플라스틱으로 제작된 N사의 로고가 박혀 있었다.

N사는 설립된 지 5년이 채 되지 않은 IT 계열 스타트업이었다. 첫 3년 간은 별다른 실적이 없어 살아남는데 급급한 기업이었으나, 최근 2년 동안 유례없는 실적 향상을 이뤄 이제는 업계에서 주목받는 유망 기업이 되어 있었다. 특히, 몇 개월 전에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K그룹과 협력 관계를 맺으면서는, 기업의 평가 가치가 순식간에 5배 이상 치솟기도 했다.

그 N사의 대표이사가 사용하는 집무실에 두 남자가 있었다. 한 남자는 이 회사의 오너이자 대표이사로서, 캐주얼한 옷차림을 하고 집무용 책상에 엉덩이를 반쯤 걸친 채 앉아 있었다. 그리고, 다른 남자는 검은 정장에 검은 넥타이를 하고, 뒷짐을 진 채 대표이사를 향해 서 있었다. 대표 이사는 얼굴에 기쁨이 가득했고, 검은 넥타이의 남자는 표정이 없는 건조한 얼굴이었다.

"계획대로 모두 처리했습니다. 공장은 완전히 불타 없어졌습니다. 경찰이 화재 원인을 수사 중이지만, 누전으로 인한 사고로 마무리될 겁니다."

검은 넥타이의 남자가 말했다.

"윤 사장은 어떻게 됐지?"

대표가 물었다.

"숙직실에서 자다가 미처 빠져나오지 못하고 죽은 것으로 되었습니다."

남자가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수고했어. 이것으로 우리 회사는 또 성장할 수 있겠군."

대표는 한쪽에 놓여 있던 종이컵을 들어 그 안에 들어있던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다시 내려놓았다. 그리고, 걸터앉아 있던 책상에서 일어나 사무실 한 편에 있는 철제 금고를 향해 이동했다. 금고를 연 대표는 그 안에서 어른 주먹만 한 크기의 구슬 하나를 꺼냈다. 그 구슬은 빛을 발하고 있었는데, 그 빛은 어쩔 때는 붉은빛으로 보였다가, 잠시 후에는 보라색으로 보이기도 하고, 다시 푸른빛을 발하기도 하는 등 시시각각 다른 빛깔을 내보이고 있었다.

"네가 나를 찾아와서 이 구슬에 대해 이야기했을 때는 사무실에 사람을 잘못 들였다고 생각했지. 사기꾼도 말은 그럴듯하게 하는 법인데, 너무 허무맹랑한 얘기를 하니까 황당하더라고. IT 기업 대표를 찾아와서 기껏 하는 얘기가 행운을 가져오는 구슬 얘기라니, 어처구니가 없었어. 게다가, 행운과 함께 불행도 가져다준다고 하니, 그럼 결국 쓸모도 없는 물건인 거잖아. 그런데, 그게 정말로 행운을 가져오는 구슬이었어. 게다가, 불행을 다른 사람에게 만들어 놓으면 나는 그만큼의 행운만 이용할 수 있으니, 얼마나 기가 막힌 물건인가. 네가 그 사실을 입증해 보인 후에도 한동안은 정말 믿기가 어려웠단 말이야."

대표는 구슬을 조심스럽게 금고 안에 내려놓고 금고의 문을 잠갔다. 그리고, 자신의 자리로 가서 의자에 앉았다.

"그때부터 우리 회사는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지. 그 전에는 구하기 어려웠던 투자자가 제 발로 찾아오기도 하고, 하는 일마다 성공해서 매출도 크게 늘어나고. 물론, 누군가는 그만큼 불행해졌지만 말이야. 이게 다 저 구슬 덕분이지. 아니, 네가 나에게 와야 할 불행을 다른 곳에 잘 전가해 준 덕분이라고 해야 하나?"

대표의 얼굴에서는 시종일관 기분 좋은 미소가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그건 그렇고, 다른 쪽도 잘 진행되고 있겠지?"

"네, 모두 차질 없이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검은 넥타이를 맨 남자의 얼굴에는 여전히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그래, 불행을 전가하기 전에 행운으로 먼저 연결되어야 한다는 것이 영 번거롭기는 해. 그래야 쌍둥이 같은 행운과 불행을 둘로 나눌 수 있게 되니까 말이야. 그렇지?"

"네, 맞습니다."

"다른 곳도 뒤탈 없게 확실히 처리하라고. 이대로만 가면 3년 안에 우리가 K그룹보다 더 커질 수도 있을 거야."

대표는 종이컵을 들어 다 식은 커피를 한 번에 마시고는, 빈 종이컵을 구겨 쓰레기통에 던져 버렸다. 기분이 워낙 좋아서인지, 책상 맞은편 벽에 걸려있는 그림 속 여자도 대표를 향해 웃어주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3


사무실은 사람들이 움직이는 소리로 시끄러웠다. 가방을 메고 서둘러 엘리베이터를 향해 달리는 사람도 있었고,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 다른 동료를 기다리며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도 있었다. 샌드위치로 저녁을 때우며 휴대폰으로 무언가를 보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그 어수선한 한가운데에서, 빨간색과 검은색으로 이루어진 테의 안경을 쓴 여자가 모니터와 수첩을 번갈아 보며 수첩에 무언가를 적어 내려가고 있었다. 모니터에는 얼마 전 있었던 한 공장의 화재 사건에 대한 기사가 출력되고 있었고, 여자의 수첩에는 여러 가지 사건에 대한 간단한 기술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펼쳐져 있는 페이지의 아래쪽에는 N사의 이름이 밑줄, 동그라미, 그리고 별표와 함께하고 있었다.

"밥 먹고 하지?"

같이 일하는 선배가 여자의 책상 옆으로 와 물었다.

"아, 저는 이따가 따로 먹을게요."

여자는 선배의 얼굴을 확인한 후 다시 모니터로 얼굴을 돌리며 대답했다.

"뭐 괜찮은 건수 하나 잡은 거야?"

선배가 여자의 수첩을 흘깃 보며 다시 물었다.

"아니요. 그냥 확인하고 싶은 게 좀 있어서요."

여자는 선배를 향해 웃어 보이며 별거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그래, 그럼 우리끼리 먹고 올게. 굶지는 말라고."

"네"

선배는 다른 동료들이 기다리는 곳으로 걸어갔고, 여자는 안경을 고쳐 쓰며 다시 모니터와 수첩에 집중했다.

여자가 N사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우연이었다. 잘 나가던 회사가 몇 개월 전에 있었던 직원들의 사고 이후로 어려움을 겪게 된 것에 대해 취재를 하던 중, 며칠 전 있었던 부천 소재 공장의 화재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 회사와 공장이 모두 N사와 관계가 있다는 것에 크게 의미를 두지는 않았다. 그런데, 오늘 아침에 어떤 스타트업의 폐업 소식을 들었고, 그 스타트업이 한 때는 N사와 함께 유망한 스타트업으로 손꼽히던 곳이라는 얘기를 듣고,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N사와 협력했던 기업이나 사람들에 대해 알아보기 시작했고, 유독 나쁜 일을 겪은 기업이나 사람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일들이 모두 N사가 눈부신 성장세를 보이기 시작한 이후에 발생했다는 사실 또한 확인할 수 있었다.

"흠..."

한동안 작업을 계속하던 여자는 펜을 내려놓고, 양 팔꿈치를 의자 팔걸이에 걸친 후에, 한 손의 두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받치듯 찌르면서 생각에 잠겼다. 무언가 석연치 않은 것이 배후에 있는 것 같았지만, 확신하기는 어려웠다. 어디서부터 단서를 수집해야 할 지도 난감했다. 역시 이럴 때는 종종 사용하던 방법을 써보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바로 '일단 당사자를 만나서 찔러보기'였다. 아무리 자신을 잘 숨기는 사람도, 예상치 못한 곳에서 약점을 찔리면 자신도 모르게 신호를 발산하게 되는 법이다.

"그래, 그래야겠어."

여자는 컴퓨터 화면을 잠금화면으로 바꾸고, 수첩을 집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휴대폰으로 어딘가에 전화를 걸면서,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 엘리베이터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4


대표실의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마주 보며 앉아 있었다. 인터넷 신문사의 기자가 요즘 핫하게 떠오른 N사의 대표와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는 현장이었다. N사가 유망한 스타트업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이후 이미 수차례 인터뷰를 경험한 바 있었기 때문에, 대표는 능숙하게 기자의 질문에 대답해 나가고 있었다.

"우리의 목표는 사람들이 시간을 좀 더 가치 있게 사용할 수 있도록 돕는 데 있습니다. 인생은 무한하지 않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시간은 정해져 있죠. 그 시간들을 좀 더 가치 있게 사용할 수 있다면 삶 자체가 가치 있는 삶이 되는 것 아닐까요? 물론, 어떻게 시간을 써야 가치 있는 시간이 될지는 각자가 생각해야겠죠. 우리는 단지, 사람들이 스스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곳에 쓰는 시간을 줄여주고 싶은 겁니다. 그럼으로써 사람들에게 시간을 돌려주는 것이죠. 그 시간의 대가로 돈을 버는 것이고요."

회사의 비전에 관한 질문에 대표는 이미 몇 번이나 말한 적 있는 대답을 다시 반복했다. 워낙 여러 번 반복한 대답이다 보니, 마치 노래를 부르듯 정해진 대답이 술술 나왔다.

"그렇군요. 무척 인상적인 비전이네요. 그런 비전을 시장도 투자자들도 좋게 평가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기자는 대표의 대답을 노트북에 타이핑하고 있었다.

"이쯤에서 잠깐 화제를 돌려볼까요? 최근에 부천에 있는 어떤 공장에서 화재가 발생한 일이 있었죠. 회사 사장이 빠져나오지 못하고 사망한 안타까운 사건이었는데요. 혹시 알고 계신가요?"

기자가 안경을 고쳐 쓰며 물었다.

"네? 아, 네... 알고 있습니다. 우리 회사와 파트너십을 맺고 있는 회사였으니까요. 참 안타까운 일이죠. 의욕이 넘치고, 매사에 긍정적인 분이셨는데요."

시종일관 미소를 짓고 있던 대표의 얼굴이, 이제는 어색한 안타까움으로 채워져 있었다.

"그 공장으로부터 납품받고 있던 것으로 알고 있어요. N사에도 영향이 있었을 것 같은데, 어떤가요?"

기자가 대표의 얼굴을 살피며 다시 물었다.

"아, 계약했던 물품은 이미 모두 인수받은 상태였습니다. 다음 계약에 대해 협의하고 있는 중이긴 했는데, 다른 업체들도 있기 때문에 우리 사업에는 크게 영향은 없을 것 같네요."

대표는 대답을 하고 나서, 앞에 놓여있던 물을 한 모금 들이켰다.

"그런데, 최근에 이상한 이야기가 떠돌고 있더라고요?"

기자는 대표를 향해 친절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질문을 던졌다.

"어떤 이야기 말인가요?"

대표가 굳은 표정으로 되물었다. 기자는 대표와 계속 눈을 마주치며 이야기를 꺼냈다.

"N사와 협력 관계를 맺었던 업체나 사람한테는 꼭 안 좋은 일이 생긴다고 하더라고요. 화재가 발생한 그 공장도 그렇고, 그전에 전략적 제휴를 맺었던 회사는 현재 폐업을 했고요. 직원들이 워크숍 갔다 오다가 사고를 당해서 어려움을 겪었던 회사도 있었네요. 아, 한 유명 인플루언서는 N사와 프로젝트를 함께 진행한 뒤에 건강상의 이유로 개인 방송을 중단했다고도 하더라고요?"

"그건 다 우연의 일치입니다. 하필이면 왜 우리와 같이 일했던 파트너들한테 그렇게 안 좋은 일이 자꾸 생기는지, 저도 안타깝고 마음이 좋지 않습니다."

말을 하고 난 대표의 미간이 약간 찌푸려졌다.

"전부 N사와는 관련 없는 일인가요?"

기자의 말투는 단순한 호기심을 가장하고 있었지만, 눈빛은 상대방이 진실을 말하고 있는지 탐색하려는 눈빛이었다.

"잠깐만요. 지금 그 일들에 우리 회사가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너무 영화 같은 얘기 아닙니까? 그 일들로 우리가 얻은 이익이 있나요? 우리도 그 일들 때문에 사업에 차질이 있었습니다. 새로운 파트너를 구해야 했고, 다른 대안을 찾아야 했으니까요. 우리는 오히려 피해를 봤어요."

대표는 그런 의심을 받는 것이 어이없다는 듯이 얘기하고 있었다. 하지만, 대표의 눈은 기자의 얼굴에서 무언가를 찾아내려 하고 있었다.

"아, 물론 그렇겠죠. 맞습니다. N사에도 도움 될 것이 없는 일들이었죠. 워낙 음모론이 유행이니까요."

미소를 지으며 기자가 말했다. 그리고, 손에 들고 있는 수첩을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5


"아무래도 그냥 두면 안 되겠어. 위험 요소는 더 커지기 전에 잘라내지 않으면 안 돼"

의자에 앉아있는 대표가 등받이에 기댄 채 검은 넥타이의 사내를 보며 말했다.

"어차피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할 겁니다."

사내는 뒷짐을 지고 책상 옆에 서 있었다.

"혹시 모르니까 말이야. 미꾸라지 한 마리가 돌아다니기 시작하면 여러 가지가 귀찮아져. 우린 아직 해야 할 일이 많다고. 물을 더 흐리기 전에 솎아내야지."

"알겠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 행운과 그 기자의 행운을 연결하지? 그래야 우리에게는 좋은 일만 생길 텐데 말이야. 그 기자는 분명 우리와는 아무것도 같이 하려고 하지 않을 거야."

대표가 책상에 양 팔꿈치를 대고 두 손을 깍지 끼며 말했다.

"행운이 필요한 게 아니고 단순히 그 기자를 제거하는 것이라면, 우리와 연결하지 않아도 됩니다. 기자의 가족에게 행운을 만들어 주고 그 기자를 제거하면, 불행이 다른 곳으로 번지지 않을 겁니다. 당연히, 우리와는 아무 상관없는 일이 됩니다."

무표정한 얼굴로 사내가 대표를 향해 말했다.

"그런 게 가능한가?"

"네, 구슬이 행운과 불행을 통제하니까요."

"좋아! 그렇다면 빨리 실행하라고. 골치 아픈 문제일수록 빠르게 해결해야지."

대표의 얼굴에 웃음이 가득했다.

"네, 바로 진행하겠습니다."

대답을 한 후 검은 넥타이의 사내는 대표실 문을 열고 나갔다. 대표는 기분이 좋아졌다. 생각지도 못한 방해꾼이 나타나서 머리가 아팠는데, 의외로 손쉽게 해결이 가능할 것 같았다. 다만, 앞으로는 일을 더 신중히 진행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창 밖으로 보이는 하늘이 오늘따라 유난히 맑아 보였다. 대표의 등 뒤 벽에 걸려있는 그림 속 여자가 대표를 향해 묘한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6


기자는 주차를 마친 후에 차에서 내렸다. 언덕에 자리 잡은 아파트 단지에서, 기자의 집은 두 번째로 높은 위치에 있었다. 하지만, 집 근처에 주차할 자리가 없어서 가장 아래쪽에 있는 다른 동의 주차창에 차를 주차했다. 위쪽의 주차장은 아래쪽보다 협소해서, 저녁 9시만 넘어도 자리가 꽉 차기 일쑤였다. 그러니, 지금처럼 밤 12시가 다 돼가는 시간에는 자리가 있을 리 없었다. 그나마 아래쪽에라도 빈자리가 있는 것이 다행이었다.

워낙 늦은 시간이라서 그런지, 언덕을 올라가는 길에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도 자주 다니는 길인 데다, 가로등도 많고, 조금 떨어져 있지만 경비초소도 군데군데 있기 때문에 늦은 시간에도 안심하고 다닐 수 있는 길이었다. 늦게까지 회식이 있었지만 운전을 핑계로 술은 한 잔도 마시지 않았다. 그런데도 언덕을 올라가는 다리가 평소보다 무겁게 느껴졌다. 하루 종일 운전을 많이 해서 그런지 무척 피곤했다.

걸을 때는 스마트폰을 보는 것이 습관이었다.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확인해 보니, 엄마로부터 부재중 전화가 수십 통 와 있었다. 늦게 들어가도 전화 한 통 없는 것이 보통인데, 무슨 일이 있나 생각하면서 핀 번호를 입력하고 스마트폰을 열어 봤다. 문자 앱에는 아직 확인되지 않은 문자가 있다는 빨간색 동그라미가 숫자와 함께 표시되어 있었다. 문자 앱을 먼저 실행시켜 보니, 거기에는 엄마로부터 온 문자가 가장 상단에 강조되어 표시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 있는 첫 문장이 기자의 시선을 강하게 끌었다. 문자를 열어 본 기자는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움직일 수 없었다.

문자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행운을 알려주고 있었다. 혹시나 하고 꿈꿔본 적은 있고, 누군가에게는 반드시 일어나는 일이지만, 그런 일이 기자의 가족에게 일어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 일이 일어났다. 로또 1등의 행운이 기자의 가족을 찾아온 것이다.

심하게 뛰는 가슴을 억지로 진정시키면서, 떨리는 손으로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바로 그때, 기자는 등 뒤에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깜짝 놀랐다. 그와 동시에 눈앞이 번쩍하는 느낌, 그리고 무언가에 뒤통수를 부딪히는 느낌이 들었다.


검은 모자를 쓰고, 검은 재킷을 입은 남자가 겨드랑이에 몽둥이를 낀 채 몸을 수그리고 있었다. 남자는 언덕길에 누워있는 여자의 가방에서 지갑을 꺼내 들었다. 지갑 속을 확인한 남자는 현금만 꺼내고 지갑을 여자 옆에 던져두었다. 그리고, 아파트 단지의 가장 어두운 곳을 향해 서둘러 달려갔다.


7


오후 6시 5분, 음식점은 저녁을 먹으러 온 사람으로 가득했다. 10개 정도 되는 테이블에는 이미 식사를 하고 있는 일행도 있었고, 주문을 한 뒤 식사를 기다리고 있는 일행도 있었다. 메뉴판을 보며 아직 무엇을 먹을지 고르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의 행동은 서로 달랐지만, 시선은 모두 한쪽 벽에 설치된 텔레비전을 향하고 있었다. 텔레비전에서는 조금 전 전국에 있는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한 소식이 뉴스를 통해 전해지고 있었다.

"오늘 아침, 한 인플루언서에 의해 공개된 내용이 전국을 들썩이게 하고 있습니다. 인플루언서 L 씨는 자신이 운영하는 개인 방송에서, 최근 급성장하고 있는 N사의 숨겨진 진실에 대해 공개했습니다. L 씨는 공개한 내용을 통해, 최근 부천에서 있었던 공장 화재 사건의 배후에 N사가 있으며, 그 밖에도 협력사를 파산시키고, 협력사의 직원들이 탄 버스에 사고를 내는 등의 일을 N사가 저질렀다고 주장했습니다. L 씨는 이와 관련된 증거를 방송에서 공개했으며, 해당 증거를 이미 검찰에 넘겼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증거 수집에 관련된 모 기자의 피살 사건도 N사가 벌인 일이라고 주장하면서, 검찰의 신속한 수사를 촉구했습니다.

한편, N사는 취재진의 취재 요청에 전혀 응하지 않고 있으며, N사의 대표이사 김 OO 씨의 소재는 현재 파악되지 않고 있습니다. 검찰은 현재 넘겨받은 자료를 검토 중인 것으로 확인되고 있는데요. 조만간 김 OO 대표에 대한 긴급 체포가 이루어질 것이라는 관측이 제기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8


대표실에는 온갖 물건들이 자기 자리를 찾지 못하고 사방에 흩어져 있었다. 벽에 걸려 있는 그림만이 온전히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는 듯이 보였다. 대표는 이미 패닉에 빠져 있었다. 검은 넥타이의 사내는 뒷짐을 쥔 채 문을 뒤로하고 서 있었고, 대표는 사내를 향해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어떻게 그 기자가 그런 걸 다 가지고 있을 수가 있는 거지? 이게 말이 돼? 네가 분명히 깔끔하게 처리했다고 했잖아! 이제 우린 다 끝났어! 끝났다고!"

대표의 시선이 한 곳에 머무르지 못하고 방의 이곳저곳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머리가 아니라 눈이 본능적으로 무언가를 찾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마침내 원하는 것을 찾았는지, 대표의 시선이 금고에 머물렀다. 그리고 패닉에서 탈출한 듯 환하게 웃으며 대표가 소리를 질렀다.

"그래! 구슬이 있었지! 구슬을 이용하면 이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을 거야! 너는 어서 가서 우리와 행운을 나눠 가진 사람들에게 불행을 만들어 내. 누구라도 좋아. 최대한 많은 불행을 만들어 내라고. 그러면 우리는 같은 크기의 큰 행운을 가지게 될 테고, 그걸 이용해서 이 상황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 거야!"

그렇게 말하면서 대표는 서둘러 구슬이 들어있는 금고를 열었다. 하지만, 금고는 대표가 기대하던 이야기를 해주지 않았다. 금고 안을 본 대표는 숨이 막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어... 어... 어떻게 된 거야? 왜 구슬이 깨져 있지?"

금고 안의 구슬은 세 조각으로 쪼개져, 처참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부... 분명히 어제까지 멀쩡했다고! 이 금고는 나 밖에 열 수 없는데... 왜 이게 깨져있는 거야?"

망연자실한 표정을 하면서 대표는 깨진 구슬 조각을 손에 올려놓고 있었다. 신비한 빛을 발하던 구슬이, 지금은 그저 깨진 유리구슬에 지나지 않았다. 그 모습이 마치 자기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그때였다.

"시간이 됐습니다."

아무 말 없이 대표를 지켜보기만 하던 검은 넥타이의 사내가 갑자기 말을 꺼냈다. 그 말에 대표는 깜짝 놀랐다.

"시간? 무슨 소리야? 무슨 시간이 됐다는 거야?"

대표가 몸을 돌려 커진 눈으로 사내를 쳐다보며 물었다.

"주인님의 일을 마무리 지을 시간입니다."

사내가 건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주인? 주인이라니? 무슨 말이야 그게?"

사내의 알 수 없는 말에 어리둥절해진 대표가 물었다. 그러자 사내가 말을 이었다.

"저는 K 그룹을 위해 일합니다. K 그룹의 불행 관리인이죠. K 그룹은 사업 규모가 워낙 크기 때문에, 어지간한 불행으로는 필요한 만큼의 행운을 만들어내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당신 같은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당신은 불행을 모으는 매개체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겪었던 불행들이 당신에게 큰 행운을 모아주고, 그 큰 행운에 걸맞은 불행을 당신에게 만들어 주면서, 최종적으로 K 그룹이 그만큼의 행운을 사용할 수 있게 되는 겁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사내가 여느 때와 같이 일정한 톤으로 말했다.

"뭐라고? 그럼, 그동안 날 이용했다는 거야? K 그룹에 큰 행운을 만들어 주기 위해 큰 불행에 빠지는 역할이라는 거야? 내가? 이 회사가?"

대표가 잔뜩 굳은 얼굴로 말했다.

"이해가 빠르시군요."

사내는 여전히 표정이 없었다. 대표는 갑자기 다리에 힘이 풀린 듯,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다 금방 다시 일어나서 사내를 노려보며 말했다.

"내가 가만히 당하고만 있을 줄 알아? 검찰에 가면 다 말하겠어! 너희들도 나랑 똑같이 당하게 해 줄 거라고!"

대표의 외침에 사내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바로 말을 꺼냈다.

"목숨이 아깝지 않다면 알아서 하십시오. 당신뿐만 아니라 당신 가족과, 당신이 아는 모든 사람이 위험에 처할 겁니다. 우리가 일하는 방식을 이미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사내는 거기까지 말하고 몸을 돌려 방을 나가려고 했다. 그러다 문고리를 잡은 채 대표를 향해 몸을 돌렸다. 사내의 얼굴에는 옅은 미소가 서려 있었다.

"그래도 한동안, 좋은 꿈을 꾸지 않았습니까? 감옥 생활 잘 즐기시길 바랍니다."

그렇게 말하고 사내는 문을 열고 나갔다. 대표는 다시 의자에 쓰러지듯 주저앉아 멍하니 바닥만 쳐다보고 있었다. 문 옆에 걸려 있는 그림 속 여자가 언제나와 똑같이 대표를 향해 미소 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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