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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취한하늘 Feb 05. 2021

[Movie] 우리는 모두 자유를 원한다.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영화의 내용과 결말을 알아도 괜찮은 분만 읽어주세요.


자유란 과연 무엇일까?


1789년 8월 26일은 인류에게 특별한 날이다.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로우며, 또한 평등한 권리를 갖는다는 선언이 이루어진 날이다. 자유와 평등에 대한 투쟁은 이전부터 있어 왔지만, 이날 이후로 '자유'는 별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닌, 그저 인간이기 때문에 당연히 누려야 하는 무언가가 되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자유'를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타인의 '자유'를 속박하는 사람들에게 분노를 느끼고,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해 동정심을 갖는다. '자유'를 구속하는 것 자체를 '폭력'으로 여기기도 한다.

자유란 과연 어떤 것일까? 무엇이 우리로부터 자유를 빼앗아 갈 수 있을까? 자유가 없는 삶은 정말로 불행한 삶일까? 사춘기 때부터 '자유'는 나에게 중요한 주제였지만, 여전히 참 알 수 없는 주제이기도 하다.


백야 - 모든 것을 잃더라도 난 '자유'를 원해


'탈출'을 주제로 한 영화는 많다. 대표적으로 '빠삐용'이 있고, '쇼생크 탈출'이 있다. 이런 영화들이 사람들에게 감흥을 주는 것은 자유를 향한 인간의 열망을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끝없이 탈출을 감행하는 빠삐용이나 19년 동안 벽을 파서 탈출에 성공한 앤디 듀프레인의 이야기는 사람들에게 감흥을 주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나에게는, 다른 어떤 주인공보다도 백야의 니콜라이가 가진 자유를 향한 열망이 더 강렬하게 느껴졌다.

주인공 니콜라이는 소련에서 미국으로 망명했던 무용수다. 그런데 어느 날, 타고 있던 비행기가 고장으로 소련에 불시착하고, 정체가 발각 난 니콜라이는 다시 소련에 억류되고 만다. 소련을 버리고 타국으로 망명했던 무용수이니 수용소로 보내지는 것이 보통일 텐데, 그의 재능을 아까워하는 사람들 덕분에 그는 소련에서 다시 무용수로 활동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하지만 부도, 명예도, 사랑도 니콜라이가 원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가 원한 것은 오직 하나, 자신이 원하는 대로 춤출 수 있는 '자유' 뿐이었다.

내가 '백야'의 니콜라이를 '쇼생크 탈출'의 앤디 듀프레인과 구분 짓는 부분이 바로 이 부분인데, 앤디 듀프레인이 모든 것을 잃은 절망적인 상태에서 벗어나고자 했다면, 니콜라이는 모든 것을 포기하더라도 오직 '자유' 하나만을 원했다는 것이다. 안락하고 편안한 삶,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할 수 있는 삶보다는 자신의 의지를 자유롭게 펼칠 수 있는 삶을 원했고, 그런 삶을 얻기 위해 어떤 위험도 감수할 수 있었다. 그런 면에서 자유에 대한 갈망은 앤디보다 니콜라이가 더 강렬했다고 할 수 있고, 그런 면이 나에게는 무척 감동적으로 다가왔다.


트루먼 쇼 - 무엇이 우리를 속박하는가


'빠삐용', '쇼생크 탈출', '백야'가 물리적인 구속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반면에, '트루먼 쇼'는 다소 추상적이고 모호한, 하지만 현대인들이 겪고 있는 구속에 대해 다루고 있다. 주연 배우가 짐 캐리인 데다가 영화가 전체적으로 코미디의 모양새를 가지고 있지만, 그 안에는 그냥 웃어넘길 수 없는 이야기가 담겨 있다.

영화 속에서 트루먼은 좋은 가정과 좋은 직장을 가진 평범한 시민이다. 그는 자신의 삶에 만족하며 행복하게 지내고 있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이상한 일들에 관심을 갖게 되고, 결국 자신이 관찰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영화 속의 관찰자들, 그리고 관리자들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많은 현대인들이 자신은 매우 자유로운 상태에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실제로 지금 시대가 어느 시대보다 자유로운 시대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대인들은 알게 모르게 많은 것에 구속받고 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사회적 통념이다.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끊임없이 강요받는다. 행복한 삶 혹은 미래를 위한 것이라는 명분 아래, 무엇을 알아야 하고, 어떤 사람을 만나야 하며, 어떤 생활 습관을 가져야 하는지 등에 대해 지속적으로 훈련받는 것이다. 심지어 그렇게 성장한 어른들은,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이끌어가기보다는 남이 좋다는 대로 따라가는 것을 편하게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자발적인 굴레는 부모 세대에서 자식 세대로 이어진다.

트루먼의 삶이 어찌 보면 나쁘지 않은 삶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의지에 의해 흘러가는 삶이란, 아무리 편안하고 안락하더라도 과연 본인의 삶이라 할 수 있을까? 그는 자유롭다고 말할 수 있을까? 트루먼이 자신에게 강요된 환경에서 벗어나는 장면이 주는 통쾌함은 어쩌면 우리 자신의 숨겨진 열망을 대변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길버트 그레이프 - 나를 구속하는 가장 강한 속박


추상적이고 모호한 속박에는 사회적으로 형성된 굴레만 있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개개인이 처한 상황이나 환경이 개인을 속박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런 상황이나 환경, 혹은 관계로부터 오는 속박은 어떤 속박보다도 개인을 강하게 구속할 수 있다.

영화 '길버트 그레이프'의 길버트는 불우한 가정을 이끌어가는 청년 가장이다.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난 아버지의 자살, 그 충격으로 삶을 놓아버리고 거구가 된 어머니, 의사로부터 10살을 넘기기 힘들 거라는 얘기를 들었던 17살의 정신지체 남동생, 자기 앞가림하기에도 벅찬 여동생과 누나. 길버트는 거구의 어머니를 위해 지하실에 몰래 설치한 버팀목처럼, 가족이 무너지지 않게 온몸으로 가족을 지탱하고 있었다. 넓은 세상을 한참 누비고 다녀야 할 나이에, 길버트는 가족에 묶인 채 꿈도 희망도 없이 지루한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길버트를 묶어두고 있던 것은 어떤 물리적인 힘이 아니다. 길버트에게 의지하는 사람들, 그들에 대한 길버트의 애정이 길버트를 강하게 구속하고 있었다. 애정과 책임감으로 형성된 이런 구속은 어쩌면 눈에 보이는 속박보다 훨씬 강한 구속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그런지 다른 영화와 달리, 길버트는 스스로의 의지로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길버트를 붙잡고 있던 환경이 변한 다음에야, 속박이 길버트를 놓아준 다음에야, 길버트는 자유를 획득하고 세상 밖으로 나간다.

길버트가 스스로의 힘으로 속박에서 벗어나지 않은 것을 잘했다 못했다 평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가족은 길버트에게 너무나도 소중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 굴레에서 벗어나 캠핑카를 타고 떠나는 길버트의 얼굴이 영화 속에서 가장 편안하고 행복한 모습이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나만의 착각은 아니었을 것 같다.


우리는 얼마만큼 자유로운 걸까?


'사피엔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는, 애초 자연에 '자유'니 '인권'이니 하는 개념은 없으며 오직 인간이 만들어낸 창조물일 뿐이라고 말한다. 동시에, 자연에는 없는 그런 발명물을 만들어 내는 능력이 인간을 독보적인 존재로 만들었다고도 한다.

나는 '자유'를 모든 동물이 추구하는 공통된 가치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다만 인간은 그것을 성공적으로 쟁취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근현대에 들어서는 오히려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관념, 물건, 제도 등에 인간 자신이 점차 속박되고 있는 것 같다. 유발 하라리도 인간의 멸종은 개체가 사라지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자유 의지를 스스로 버리는 데서 오게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지금으로부터 30년쯤 지난 미래에 과연 우리는 얼마만큼의 자유를 누리고 있을까? 아니, 지금의 나는 충분히 자유롭게 살고 있는 것인지, 그것부터가 알 수 없는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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