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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취한하늘 Nov 17. 2023

그때 그 시절 - 컴퓨터

내가 컴퓨터를 처음 사용해 본 것은 아마 1988년이었던 것 같다. 그 해, 형이 대학교에 진학했고, 진학 선물로 어머니께서 컴퓨터를 사주셨다. 기종은 APPLE II+였고, 모니터를 포함해서 당시 30만 원대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굉장히 조악한 기계지만, 당시로서는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모니터는 작은 브라운관이었는데, 모노컬러 모니터였다. 모노컬러라고 하면 보통 '흑백'을 생각할 테지만, 흑백이 아니고 녹색으로 나오는 모니터였다. 지금도 영화나 드라마에서 옛날 컴퓨터가 나오면 스크린이 녹색으로 되어 있는 것이 등장하는데, 바로 그런 모니터였다.


본체는 가로로 긴 직육면체 모양이었다. 그래서 본체 위에 모니터를 얹어 놓았다. 당시만 해도 가로로 긴 직육면체 모양이 많았는데, 이때만 해도 모니터가 아주 무겁지는 않았기 때문에 본체 위에 올려놓아도 무리가 없었다. 하지만, 모니터가 커지면서 무게가 상당히 무거워졌고, 더 이상 모니터를 본체 위에 올려놓을 수 없게 되면서 가로로 긴 본체가 거의 사라졌던 것 같다.


컴퓨터에는 운영체제가 따로 없었다. 프로그램이 들어 있는 디스크를 드라이브에 넣고 전원을 켜면 프로그램이 동작하는 방식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래서, 새로운 프로그램을 돌릴 때마다 컴퓨터를 다시 껐다 켜야 했다. 특이한 일은, 당시 컴퓨터가 있던 방의 전등을 켜면 컴퓨터가 동작을 멈추었다는 것이다. 전등이 켜져 있거나 꺼져 있는 것은 상관없는데, 꺼져 있던 전등을 켜는 순간에 컴퓨터가 동작을 멈추었다. 형광등은 켤 때 순간적으로 전력을 많이 소모하는데, 그것이 컴퓨터에 영향을 준 게 아닌가 싶다. 어쨌든, 낮부터 게임에 열중하고 있으면 저녁이 되어도 전등을 켤 수 없어, 어두 컴컴한 방에서 게임을 했던 기억이 있다.


중학생이었던 내가 컴퓨터로 하는 것은 대부분 게임이었다. 전자 오락실에 살다시피 했던 내게 컴퓨터 게임은 새로운 경험이었다. 물론, 프로그래밍도 그때 처음 해보고, 그림 그리는 프로그램 같은 것도 써봤지만, 대부분은 게임을 하는 데 사용했다. 그런데, APPLE II+에는 하드 디스크가 없었다. 5.25인치 플로피 디스크에 게임을 담아서 드라이브에 넣고 해야 했는데, 5.25인치 플로피 디스크는 수명이 짧아서, 롤플레잉 게임처럼 엔딩을 보는 데 오래 걸리는 게임은 엔딩을 보기 전에 디스크가 먼저 망가졌다. 그래서, 롤플레잉 장르를 가장 좋아하는 데도 불구하고 엔딩을 본 게임은 하나밖에 없었다. 


당시에는 한글로 된 게임이 없었다. 전부 영어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게임을 할 때는 영어 사전이 필수였다. 문법을 다 몰라서 완전히 해석이 안 되기는 했지만, 그래도 영어 사전을 찾아가며 열심히 해석하려고 노력했다. 덕분에 영어 단어를 많이 알게 되었는데, 학교 성적에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게임을 하면서 배운 단어들은 'shield', 'magic', 'monster' 같은 것이었고, 절대로 시험에 나오지 않는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기억나는 것은 'might'라는 단어인데, 내가 특별히 더 좋아했던 게임의 제목에 있는 단어로 '힘'이라는 뜻이었다. 이 단어를 학교에서는 다른 뜻으로 가르치는 것이 당시에는 재밌게 생각되었다.


영어로 되어 있는 것뿐만 아니라, 게임에 대한 정보도 거의 없었다. 지금은 게임을 하다 막히는 부분이 있으면 인터넷에 검색을 하면 된다. 하지만, 당시에는 그런 수단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온전히 내 힘으로 게임 속 문제를 해결해 나가야 했다. 생각해 보면 그 덕분에 게임이 더 재밌었던 것 같다. 그리고 어쩌면, 문제를 해결하는 내 역량이 그때부터 훈련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당시 APPLE II+보다 좋은 기종으로 APPLE IIe가 있었고, 나중에 더 좋은 APPLE IIGS가 나왔다. 당시 매달 보던 잡지가 '컴퓨터학습'이라는 잡지였는데, 그 잡지에 실린 APPLE IIGS 광고를 보고 감탄했던 기억이 난다. 게임이 '컬러'로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린 모노톤으로 게임을 하던 내게, 컬러로 보이는 게임 화면은 경이로웠다. 기억하기로는 APPLE IIGS의 'GS'가 'Graphic'과 'Sound'였던 것 같다.


나중에 집에 있는 컴퓨터는 IBM PC로 바뀌었다. '도스'라는 운영체제도 있고, 몇 MB밖에 안 되는 하드 드라이브도 있었다. 플레이하는 게임의 퀄리티도 올라갔고, Mdir이라는 유틸리티도 요긴하게 사용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박물관에서 만났을 때 가장 반가운 것은 역시 첫 컴퓨터였던 APPLE 컴퓨터다. 그 이후에 많은 컴퓨터를 썼지만, 특별히 애착이 가는 컴퓨터는 더 없었다. 그나마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8년 된 맥북이 정이 좀 가는 편이랄까. 게임 회사에서 20년째 일을 하고 있는 내 커리어가, 어쩌면 그 컴퓨터에서 비롯된 것일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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