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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취한하늘 Feb 23. 2024

나폴레옹 in 파리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프랑스 인물을 세 명 꼽으라면, 아마 가장 높은 확률로 포함될 사람이 나폴레옹이 아닐까 싶다. 그만큼 한국 사람에게 '나폴레옹'이라는 이름은 친숙하다. 나 역시도 어렸을 때부터 나폴레옹의 이름을 많이 들어왔다. 그래서 그런지 알렉산더, 칭기즈칸 등의 여러 정복 군주 중에서도 유독 흥미를 끄는 인물이었다.


<나폴레옹의 생애에는 이야기거리가 넘친다.>


나폴레옹이 유럽을 제패한 지도자이기는 하지만, 알렉산더나 칭기즈칸처럼 왕가의 일족이었던 것은 아니다. 심지어 유력한 집안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어려운 환경까지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그래도 자신의 능력으로 짧은 기간에 고속 승진을 하고, 결국 프랑스를 이끄는 지도자의 자리에까지 올라갔던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이것 이외에도 나폴레옹의 생애에는 극적이고 흥미로운 면이 많이 포함되어 있는데, 그것이 나폴레옹의 인기를 더 높이는 요인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나폴레옹은 전쟁을 잘했다. 전략과 전술에 모두 능한 면이 있어서, 전쟁의 전체 판도도 잘 보는 편이었고, 각각의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능력도 탁월했다. 특히, 부대의 빠른 이동으로 적의 취약점이나 전장의 핵심 지역을 공략하는 데 장점이 있었다. 때로는 무모하다 싶은 과감한 결단력으로 승리를 만들어 내기도 했는데, 이것은 나폴레옹이 전투의 핵심 요소를 잘 짚어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 같다.


나폴레옹은 군사적 능력만 탁월했던 것이 아니다. 군사적 능력이 탁월한 지휘관은 역사적으로 많이 있었지만, 나폴레옹처럼 지위가 급상승한 지휘관은 별로 없다. 나폴레옹은 정치적인 수완도 매우 좋아서, 유력한 인물과 관계를 맺어 그것을 이용하기도 했고, 대중의 인기를 확보하여 그것을 바탕으로 황제의 자리까지 오르기도 했다.


<에투알 개선문(위)과 카루젤 개선문(아래)>


파리에는 개선문이 세 개 있다. 바로, 카루젤 개선문, 에투알 개선문, 라데팡스 개선문이다. 이 중 라데팡스 개선문은 프랑스혁명 200주년을 기념하여 1989년에 건설된 것으로 파리 중심에서 많이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그리고, 나머지 두 개선문은 모두 나폴레옹이 건설한 것이다.


사람들이 많이 알고 있는 개선문은 에투알 개선문으로, 샹젤리제 거리의 끝 쪽 교차로 가운데에 있다. 높이가 약 50m에 이르는, 상당히 큰 개선문이다. 카루젤 개선문은 루브르 박물관 근처에 있는 것으로, 에투알 개선문에 비하면 작지만, 그래도 높이가 15m 정도 된다. 두 개선문은 같은 시기에 계획되었지만, 카루젤 개선문이 2년 만에 완공된 것에 비해, 에투알 개선문은 약 30년이 걸려 완공되었다. 그래서, 정작 나폴레옹은 우리가 많이 알고 있는 개선문으로는 영광의 행진을 하지 못했다. 다만, 나폴레옹이 죽은 지 거의 20년이 지난 후에 나폴레옹의 유해를 가지고 와 장례식을 치렀는데, 그때 유해가 에투알 개선문을 통과하였다고 한다.


<루브르에는 나폴레옹 시대에 약탈해 온 미술품이 많이 있다.>


콩코드 광장에는 이집트로부터 가져온 오벨리스크가 있다. 나폴레옹이 이집트로 원정을 갈 때, 부인이 오벨리스크를 가져다 달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그래서 그런지 이 오벨리스크를 나폴레옹이 가져온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도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이 오벨리스크는 나폴레옹 사후에 이집트가 프랑스와의 우호를 다지기 위해 선물한 것이다.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은 몇몇 부하만 데리고 탈출해야 했을 정도로 나폴레옹의 흑역사에 해당한다. 그래서, 유물 약탈을 염두에 두고 많은 학자들을 데리고 갔지만, 실제로 당시에 이집트에서 가져온 물건이 있을지는 모르겠다.


나폴레옹의 약탈품으로 유명한 것은 오히려 그림인 것 같다. 루브르 박물관에 가면 모나리자가 전시되어 있는 '드농관'이 있다. 드농은 나폴레옹 휘하의 미술품 관리 책임자였다. 그리고 이 전시관의 그림들 중 '모나리자'를 제외한 대부분의 그림은 나폴레옹이 이탈리아로부터 가져온 것이라고 한다. 나폴레옹이 이탈리아 북부에 원정을 갔을 때 가지고 온 그림들인 것이다. 물론, 당시에는 전쟁 중에 벌어지는 약탈을 필연적인 것으로 여기던 시대였기 때문에, 이것으로 나폴레옹을 특별히 비난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사람이 잠들어 있다.>


죽은 지 20년이 지난 후에 개선문을 지난 나폴레옹의 유해는, '앵발리드'에 안치되어 있다. 앵발리드는 나폴레옹만을 위해 만든 장소는 아니다. 루이 14세 시대에 부상병들과 퇴역 군인들을 위한 건물로 시작되었는데, 이후 증축을 거듭하였고, 나폴레옹이 1800년에 프랑스의 영웅 튀렌 자작의 시신을 앵발리드에 안치하면서 점차 프랑스 영웅들의 영묘로 사용되게 되었다.


나폴레옹이 죽은 것은 1821년이고, 나폴레옹의 유해가 파리로 온 것은 1840년인데, 앵발리드에 지금처럼 안치된 것은 1861년이라고 한다. 나폴레옹의 영묘를 준비하는데 20년이나 걸린 셈인데, 파리 사람들에게 나폴레옹이 가지는 의미의 크기를 가늠하게 된다.


<그의 삶 자체가 한 편의 드라마로 손색이 없다.>


나폴레옹은 자신의 영달을 위해 살았던 사람이다. 그리고, 스스로 황제를 칭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폴레옹 덕분에 프랑스혁명은 실패한 봉기로 끝나지 않을 수 있었고, 유럽은 시민이 중심이 되는 시대로 빠르게 넘어갈 수 있었다. 지극히 자기중심적이었던 천재,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다른 사람을 도구처럼 사용할 수 있었던 리더, 동시에 인간적인 약점도 가지고 있었던 사람. 나폴레옹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겠지만, 그가 무척 흥미로운 인물이라는 것에는 아마 이견이 별로 없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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