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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취한하늘 Sep 20. 2024

[책] 무엇이 아이를 병들게 하나, '수레바퀴 아래서'

헤르만 헤세

“그럼, 그래야지. 아무튼 지치지 않도록 해야 하네. 그렇지 않으면 수레바퀴 아래 깔리게 될지도 모르니까.”
- 헤르만 헤세, <수레바퀴 아래서>




생각해 보면 참 얄궂다. 자신의 인생에서는 아직도 서툴기만 한 어른들이, 아이들 앞에서는 모든 해답을 알고 있는 사람처럼 행동한다.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만 하면 행복한 미래가 펼쳐질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정작, 그렇게 말하는 대부분의 어른들은 10년 후에도 그다지 나아진 삶을 살고 있지 않다.


한스에게는 분명 공부에 관한 재능이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런 재능을 발견한 어른들은 그 재능을 이용하는 방법을 가르쳤다. 아니, 그 재능을 이용하라고 강요했다. 하지만, 그것은 한스가 원하는 삶은 아니었다. 한때는 어른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보람으로, 혹은 다른 친구들보다 우월하다는 느낌이 좋아서 공부에 매진하기도 했지만, 왠지 모를 공허함과 상실감이 늘 한스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하일너와의 만남을 통해 공허와 상실은 그 정체를 드러냈고, 한스는 세상이 강요하는 삶과 자신이 원하는 삶 사이에서 어느 한쪽도 확실하게 선택하지 못하는 허약한 방랑자 신세가 되었다.


한스를 둘러싼 환경이 두드러진 문제를 가지고 있는 환경은 아니었다. 명백한 폭력도 명백한 거짓도 없었다. 하지만, 당연해 보이고 일상적으로 보이는 환경이, 한스를 서서히 질식하게 만들고 병들게 만들었다. 가족도, 선생들도, 심지어 친구들도, 진정으로 한스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저 자신들이 구축한 세계에 한스가 적응하기만을 바랐을 뿐이다. 비단, 한스만은 아닐 것이다. 대부분의 아이들에게는 앞 선 세대가 끌고 가던 수레를 이어받아 끌고 가던가, 아니면 수레바퀴에 깔리는 선택지만이 있었을 것이다.


예외적으로 그 수레로부터 스스로 벗어난 이가 바로 헤르만 하일너다. 하일너는 주체적인 삶을 살고자 했고, 학교라는 굴레로부터 스스로 탈출했다. 어쩌면 한스가 원하는 삶의 모습을 헤르만 하일너가 보여준 것일 수 있다. 그런 면에서 한스와 하일너의 관계는, 헤르만 헤세의 또 다른 작품 <데미안>의 싱클레어와 데미안의 관계를 연상케 한다. 차이라면, 싱클레어는 데미안에 도달했지만, 한스는 결국 하일너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데미안은 싱클레어를 진정으로 이해하는 친구였고 싱클레어가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줬지만, 하일너는 지극히 자기중심적이었고 한스에게 진정한 관심을 갖지 않았다는 것이 싱클레어와 한스의 결말을 다르게 만든 원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지금 대한민국에는 수많은 한스 기벤라트가 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 채 누군가가 정해준 미래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아이들이 있다. 어쩌면 그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빨리 달리는 방법이 아니라, 멈추어 서서 스스로를 바라보는 방법이 아닐까. 그리고, 어른이 원하는 모습이 아니라 아이들 본연의 모습에 관심을 가져주는 한 사람이 아닐까. 그런 사람이 한 명만 있어도, 아이들은 자신이 선택한 길을 당당히 걸어가는, 온전한 하나의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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