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의 결과, 그리고 그 이후의 성장
친구와의 통화 이후,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며칠 더 고민했다.
마음가짐이 달라져서일까, 예전처럼 절망적이진 않게, 차분한 마음으로 생각을 이어나갔다.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을, 나중에 후회하지 않을 선택을 하고 싶었다.
그리고 문득 깨달았다. 단순하게, 그냥 '지금 그만두자니 아깝고, 계속하자니 어렵고'의 반복이었다.
결국 나는 박사과정을 선택했다.
아까운 건 아마도 아까운 상태로 계속 남아있겠지만, 어려운 것은 내가 어떻게든 극복할 수 있는, 내가 컨트롤 가능한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 그냥 해보지 뭐.'
크게 현실에서 달라진 것은 없었다. Qualification exam에 대한 준비를 치열하게 이어나갔고, 동시에 연구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이해하기 어려웠던 것을 극복하고, 수강하던 수업도 성적을 올리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결과적으로는 exam을 무사히 해결하여 박사 과정을 시작할 수 있었고, 연구도 본격 궤도에 올라 점점 더 집중할 수 있었다. 물론, 연구에 매진한다는 것은 실패의 연속이었지만 말이다.
어떤 날은 잘해보려고 하다가 실수해서 한 달간의 실험들이 물거품이 되었던 적도 있었고, 시간과 비용을 들이면서 처음부터 다시 하느라 진땀을 뺐던 적도 있다. 또 어떤 날은 눈이 빠지게 현미경을 들여다보며 오류를 찾고, 통계를 내기 위해 한 땀 한 땀 데이터를 수집하기도 했다. 어떤 날은 밤늦게 실험실에 있다가 주변의 장비에서 유독 가스가 새어 나와 긴급 대피를 하면서 차키를 가지고 나오지 않아 꼴딱 지새운 밤도 있었다. 그렇게 힘들게 만들어 낸 결과물이 이러저러한 이유로 와장창 깨져버리기도 했다.
처음에는 이런 실패들이 내 능력 부족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들은 다 잘하는 것 같은데, 나만 헤매는 것 같아서 좌절하고 자신감도 떨어졌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깨달았다. 이것이 연구의 본질이라는 것을. 대학원에서 연구하는 것들은 원래 쉬이 되지 않는 것들이라 대학원생들이 수련의 과정을 통해 알아나가는 주제들이고, 그것이 바로 대학의 본질적인 기능이라는 것을 받아들였다. 잘 안 되는 것에 대한 실패를 겪고, 왜 실패했는지 분석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접근법을 시도하는 것. 그 과정을 통해 성장하는 것이라는 것을 늦게라도 알게 되었고, 그리하여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점점 줄어들었다.
새로운 문화에 적응하기까지는 원래 여러 단계를 거쳐야 한다는 것도 깨달았다. 한 번은 글쓰기와 발표하는 시간에 이 주제에 대해 다룬 적이 있었는데, 글을 쓰기 위해 조사하다 보니 이에 대한 이론이 있었다. 4단계에 걸친 뚜렷한 단계로 이루어진 문화 충격과 적응 단계를 거쳐 새로운 문화에 적응하게 된다는 내용이었다. 내가 겪었던 그 힘든 마음들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문화 적응 단계였고, 그 과정을 거쳐야만 새로운 문화에 진정으로 융합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렇게 받아들이고 나니, 시간이 지나면서 미국 생활에 적응하는 것에도 변화가 조금씩 찾아왔다. 미국 사람처럼 하려고 하지 않아도 되고, 약간은 긴장을 내려놓고 자연스럽게 스며들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미국은 각자의 개성이 존중받는 사회여서 그런지 내가 두려워했던 것들은 내 안에만 있었던 것 같았고, 점점 스스로 이겨낼 수 있게 되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적응 과정이 있었기에 지금의 나는 더 유연한 시각을 가질 수 있었고, 다양성을 포용할 수 있는 태도를 가진 사람이 될 수 있었다는 점이다.
또 다른 수확은 협업을 배운 것이다.
내가 맡았던 과제는 여러 학과가 동시에 참여하여 우리 연구실과 다른 연구실이 함께 일하는 기회가 많았다. 처음에는 내 전공 분야가 아닌 사람들과 소통하는 것이 낯설고 어색했다. 자주 사용하는 용어의 교집합도 있지만 다른 것도 많았고, 연구 방법론이나 실험 방법에서 차이가 나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과 협업하며 나는 내가 알고 있는 개념을 쉽게 설명하는 법, 다른 분야의 관점에서 내 연구를 바라보기, 다른 분야도 관심 가지고 내 연구 내용을 적용하기 등으로 경험을 오히려 확장할 수 있었다.
어차피 언젠가는 여러 배경을 가진 사람들과 어디서든 함께 일할 수밖에 없을 테니, 대학원에서 훌륭한 학자들과 미리 이 훈련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역시 값진 경험이었다.
이밖에도 돌이켜보면 대학원에서 배운 것들은 정말 셀 수없이 많다.
학문적인 지식과 전문성은 기본이고, 비판적 사고력, 문제 해결 능력, 끈기와 인내심, 소통과 협업 능력,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성장하는 방법, 그리고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탐구하는 자세를 배웠다. 또한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고 넓은 세상을 경험하며 시각을 넓게 키웠다. 한국에서 살았다면 절대 만날 수 없었을 사람들, 그들과의 소중한 경험들이 내 인생을 풍부하게 만들어 주었다.
돌이켜 보면, 그때의 선택에 대해 전혀 후회하지 않는다.
쉬운 길은 아니었지만, 포기하고 싶은 순간들이 수없이 찾아왔지만, 그때마다 나를 일으켰던 그 친구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힘들면 그만둬도 돼. 지금도 넌 충분히 빛나'
신기하게도 힘을 북돋아주었던 그 이야기는 그때도, 지금도 도전에 힘이 된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다. 그리고 그 선택 하나하나의 결과가 우리를 만들어간다.
때로는 확신이 서지 않아도,
때로는 두려워도,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한 걸음씩 나아가는 것.
살아가는 용기를 내어
그래. 또 한 번 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