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미국 아니면 한국, 어디에 취직을 할까

박사과정의 끝, 그 후의 선택은

by Dr Vector

"이번엔 정말 될 것 같은데..."


실험실의 장비들을 세팅하고, 조심스럽게 실험을 시작한다. 모니터링하며 실험실 벤치 앞에서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데이터를 들여다보던 순간이 아직도 생생하다. 박사과정의 마지막, 그동안 수없이 실패했던 실험들이 마치 약속이나 한 듯 하나둘씩 성공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몇 년간 나를 괴롭혔던 연구 문제들이 퍼즐 조각처럼 맞아떨어지는 걸 보며, 드디어 터널 끝의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박사과정을 시작할 때만 해도 이 순간이 언제쯤 오려나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중간에 포기하고 싶은 순간들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실험은 실패의 연속이었고, 이렇게 저렇게 시도해 봐도 뾰족한 수가 잘 보이지 않았다. 동기들은 이미 취업에 성공했거나, 하나둘 다른 길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선배들이 걸어간 길

졸업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을 때, 가장 먼저 한 일은 주변을 둘러보는 것이었다. 나보다 먼저 이 길을 걸어간 선배들은 과연 어떤 선택을 했을까?


한국으로 돌아가 교수직에 지원하는 선배들이 있었다. 어떤 선배는 운 좋게 졸업 시점과 본인 연구 분야가 딱 맞아떨어져서 바로 교수임용에 성공하신 분도 있었고, 대부분은 몇 년간 포닥 혹은 연구원을 하며 연구실적을 더 쌓으면서 채용공고를 모니터링하다가 한국 대학의 문을 두드리는 것이다. "학교에서 연구하는 게 중독성이 있어서 못 끊겠다"며 웃던 선배의 얼굴이 떠오른다.


반면 미국에 남아 현지 기업에 취업하는 선배들도 있었다. 실리콘밸리의 화려한 기업들, 그곳에서 일하며 글로벌 무대에서 경쟁하는 모습이 부러워 보이기도 했다. "여기서 회사가 무엇을 하는지 봐야 해. 한국 가서도 써먹을 수 있잖아"라며 설득하는 선배도 있었다.


학교는 나와 같은 학생들을 위해 다양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커리어 센터에서는 이력서를 꼼꼼히 리뷰해 주고, 기업 설명회도 정기적으로 열었다. 미국 특유의 referral 문화도 큰 도움이 되었다. 아는 선배나 동기가 해당 기업에 있으면, 추천을 통해 서류 전형을 통과하고 면접 기회를 얻는 것이 일상적인 코스로 알려져 있었다.


한국의 대기업들은 미국 현지에서 적극적으로 인재를 모집하고 있었다. 한인학생회를 통해 홍보되는 채용 설명회에 가보면, 현직 임원들이 직접 와서 회사를 소개하고 학생들과 일대일 면담을 하기도 했다. 인재를 영입하고자 하는 그 진정성만큼은 충분히 전해졌다.




학계 vs 산업계, 선택의 갈림길

가장 먼저 결정해야 할 것은 큰 방향이었다. 학계에 남아 연구를 계속할 것인가, 아니면 산업계로 나가 그동안 배운 것을 현실에 적용해 볼 것인가.


솔직히 이 부분에서는 고민이 크지 않았다. 연구도 물론 중요하고 보람된 일이지만, 내가 처음 공학을 선택한 이유를 생각해 보니 답은 명확했다. '공학은 사람들의 삶을 실질적으로 편리하게 만드는 학문'이라고 생각했던 대학 1학년 때의 순수한 마음이 아직 남아있었다. 배운 것을 실제 제품이나 서비스에 적용해서, 누군가의 일상이 조금이라도 나아지는 걸 눈으로 확인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산업계 진출로 방향을 정했다. 이제 남은 건 어디서 일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미국 vs 한국, 진짜 고민의 시작

선택지는 크게 두 개였다. 미국에 남아 현지 기업에 취업하거나, 한국으로 돌아가 국내 대기업에 입사하거나.


1. 미국에 남는 것의 매력은 분명했다.

장점: 세계 최고 수준의 기업들이 집약된 곳에서, 전 세계에서 몰려든 인재들과 경쟁하며 일할 수 있다는 것.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조직문화와 성과에 따른 확실한 보상도 큰 장점이었다. 무엇보다 기술 트렌드의 최전선에서 일할 수 있다는 건 엔지니어로서 가슴 뛰는 일이었다.

단점: 하지만 그만큼 경쟁도 치열했다. 아이비리그 졸업생들, 세계 각국에서 온 천재들과 매일 경쟁해야 한다는 것은 분명 부담이었다. 그리고 미국 특유의 고용 불안정성도 걱정되었다. 언제든 레이오프 될 수 있다는 불안감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쉽지 않아 보였다.


2.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도 나름의 매력이 있었다.

장점: 우선 언어적 편안함이 있었고, 미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고용환경도 장점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한국에서 장학금을 받으며 공부했으니, 그에 대한 보답으로 내가 배운 것을 우리 사회에 어떤 형태로든 기여해야 한다는 마음도 있었다.

단점: 우려되는 부분도 있었다. 미국에 비해 경직되었다고 알려져 있는 조직문화, 상명하복의 위계질서 같은 것들이 과연 나에게 맞을까 하는 걱정이었다. 선배들로부터 전해 들은 이야기들이 모두 긍정적이지만은 않았으니까. 하지만 직접 경험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어떤 느낌일지 미리 알기는 어려웠다.




아이와 가족, 마음을 기울게 한 결정적 요소

하지만 이 모든 고민을 압도한 것은 가족이었다. 당시 우리에게는 어린아이가 있었는데, 우리 식구만 미국에 있었고, 가족들은 모두 한국에 있었다. 아이가 할아버지, 할머니는 물론이고 고모, 이모, 삼촌들과도 전혀 교감하지 못한 채 자라는 것이 안타까웠다.

맞벌이 부부가 타지에서 아이를 키운다는 것의 어려움도 몸소 느끼고 있었다. 아이가 아프면 누구 하나는 일을 포기해야 했고, 야근이나 출장이라도 있는 날이면 아이를 맡길 곳이 마땅치 않았다. 미국의 베이비시터 비용은 상상을 초월했고, 아직은 많이 어린아이를 데이케어와 같은 기관에 맡기는 것도 가능하지만 마음이 썩 내키지 않았다. 그렇다고 미국 안에서 믿고 맡길 만한 사람을 찾기도 쉽지 않았다.

부모님의 가르침도 큰 영향을 미쳤다. 공부하는 내내 부모님께서 강조하셨던 말씀이 있었다. "한국의 기업이 장학금까지 주면서 키워준 인재가, 배우고 나서는 꼭 돌아와 나라를 위해 기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다소 딱딱하거나 구식으로 들릴 수도 있지만, 그 의미는 충분히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선택, 그리고 그 후

결국 나는 한국행을 택했다. 가족에 대한 책임감, 부모님의 가르침, 그리고 내가 나고 자란 우리나라에 대한 막연하지만 진실한 애정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각 선택지의 현실적 장단점을 놓고 보면 사실 어느 쪽을 선택해도 나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마음이 기우는 쪽이 있었다.


지금 돌이켜보니, 전반적으로는 이 선택에 만족한다. 아이는 조부모님과 이모와 삼촌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라고 있고, 나 역시 한국에서 나름의 기여를 하고 있다는 성취감을 느낀다. 물론 가끔 "그때 미국에 남았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특히 실리콘밸리의 혁신적인 기업문화나 글로벌 무대에서의 경쟁을 직접 경험해보지 못한 것은 약간의 아쉬움으로 남아있다.

하지만 인생이란 게 모든 길을 다 가볼 수는 없는 법이다. 한 번의 선택으로 인해 얻는 것도 있고 잃는 것도 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내린 선택에 대해 책임지고,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아닐까.


과거의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언젠가의 나의 아이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정답은 없다는 것이다. 미국에 남든, 한국으로 돌아오든, 혹은 제3의 선택을 하든, 그것이 너희들의 가치관과 상황에 맞는 선택이라면 그것이 곧 너의 답이라는 것을 말이다.

다만 한 가지 조언하고 싶은 것은, 외부의 시선이나 남들의 기대보다는 자신의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라는 것이다. 10년, 20년 후에도 후회하지 않을 선택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해 보기를 바란다.

그리고 어떤 선택을 하든, 그 순간부터는 뒤를 돌아보지 말고 앞만 보며 달려가라. 선택 자체보다 선택 이후의 노력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잊지 말기를 바란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