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행 적응기: 미국에서 한국으로 돌아온 후의 선택
10년간의 미국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드디어 왔다'는 안도감도 잠시, 곧바로 현실의 벽에 부딪혔다. 한 대기업에 입사하게 되어 한국의 생활과 기업문화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이상하게도 미국으로 처음 건너갔을 때만큼이나 적응이 힘들었다.
일상생활부터가 낯설었다. 집 관리는 어떤 방식으로 해야 하는지, 뭔가 고장 나면 어디에 먼저 연락해야 하는지, 차량 관리는 어떻게 하는지... 기본적인 생활 시스템 자체가 내가 미국에서 익숙했던 그것과 달랐다.
'왜 우리나라에 왔는데 나는 더 어렵고 모르겠지?'
'내가 여기서 20년도 넘게 살았었는데 뭐지?'
'겨우 10년 사이 다 바뀌었나?'
미국에서 살기 전에는 부모님과 함께 살았기에 몰랐던 것들이었을 테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충격적이었던 건 사람들의 관심사였다. 직장에서 처음 만난 동료들이 나의 개인적인 부분에 굉장히 많은 관심을 보였다. "집은 어디세요?", "자녀는 몇 명이세요?", "왜 우리 회사에 오셨어요?", "집은 자가인가요, 전세인가요?" 같은 질문들을 서슴없이 던져왔다.
비밀 정보도 아니고 악의가 있는 질문도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그때는 처음 만난 사람과 이런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이 불편하고 어색했다. 아마도 (나중에 생각해 보니) 미국에서는 개인사에 대해 처음 만난 사람과 직접적으로 묻고 답하지 않았고, 어느 정도 친밀감을 쌓은 후에 조금씩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눠서 그런 것 같다. 시간이 많이 지난 지금은 익숙해졌지만, 당시에는 '왜 이런 걸 궁금해하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회사 내 조직에서의 역할도 애매했다. 원래는 박사과정에서 연구했던 분야와 겹치는 회사 연구소의 특정 팀이 있었기에 그 팀에서 역할을 잡아 입사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주하고 실제로 출근하게 되기까지 시간이 걸리면서, 회사는 내부적으로 조직개편을 하게 되었고 그 팀과 리더가 없어져 원래 가기로 했던 상황과는 다소 달라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조금 다르지만 비슷한 일을 담당하는 다른 팀에 갈 수도 있고, 회사에서 가장 핵심적인 상품에 대한 연구를 하는 부서에 갈 수도 있습니다."
일단은 핵심적인 상품을 담당하는 팀으로 가려다가, 그 팀의 리더님과 왠지 잘 맞지 않는다고 느껴져 원래 가기로 했던 팀과 비슷한 일을 담당하는 팀으로 조인했다. 몇 개월 적응하며 일하다 보니 또 조직이 변경되었고, 새로운 성격의 업무를 한참 하기도 했다가, 결국 "연구와 개발이 하고 싶다"라고 다시 부서를 옮기기도 했다.
이렇게 소속이 안정되지 못해서였을까, 아니면 일부 구성원들의 정치적 활동이나 불투명한 소통 방식이 나와 맞지 않아서였을까. 대기업의 훌륭한 복지와 부수적인 이점, 그리고 큰 조직 내에서의 성장과 같은 장점들을 온전히 느끼지도 못한 채, '여기서 내가 안정적으로 다닐 수 있는 게 맞나?'라는 고민이 시작되었다.
그런 와중에 다행스럽게도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을 발견했다. 바로 데이터였다. 큰 회사다 보니 방대한 데이터가 축적되어 있었는데, '이것으로 뭔가 재미있는 걸 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새롭게 파이썬 같은 도구를 학습하기 시작한 것도 이 시기였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이 회사에는 데이터를 총괄하는 부서가 없었고, 관련 환경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다. 데이터로 무엇을 할 수 있을지는 완전히 백지에서 시작해야 하는 상황이었고, 가이드를 줄 사람도 없었다. 나 혼자 하고 싶다고 해서 할 수 있을지도 미지수였다.
공 비슷한 것을 만들어봐야 축구공을 어떻게 만들지 대략 예상할 수 있는데, 동그란 것을 만져본 적도 없는 사람이 공을 만들어야 하는 상황과 비슷했다고 할까.
한국으로 돌아온 지 2년 반 정도 되었던 시점, 또다시 선택의 갈림길에 섰다. 계속 회사를 다니면서 맨땅인지 바위일지 모르는 곳에 헤딩을 계속할 것인가, 아니면 퇴사하고 데이터를 실제로 다룰 수 있는 환경을 찾아갈 것인가.
1. 회사를 계속 다니는 경우
장점: 현재의 처우와 대기업이라는 울타리였다. 복지, 대출, 자녀 지원 등에서 혜택이 많았다.
단점: 어떻게 성장할지 깜깜하다는 것, 그리고 데이터 관련 업무를 하기 위해서는 환경부터 구축해야 하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부딪히는 일들이 너무 비효율적으로 느껴졌다는 점이었다.
2. 퇴사하는 경우
장점: 원하는 회사에 원하는 역할로 합격할 수만 있다면, 호기심이 이끄는 분야에 풍덩 빠져서 제대로 배우면서 빠르게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성장에 따른 성취감도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단점: 현재의 처우 수준을 유지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점과 대기업에서 가졌던 장점들을 포기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퇴사하게 되면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곳이 있는지부터 알아보았다. 나이가 30이 넘어간 시점, 만약 데이터 관련 일을 하게 된다면 신입사원처럼 일해야 할 텐데, 나이 많은 사람을 받아줄 곳이 있을까. 이것이야말로 맨땅에 헤딩 아닌가 생각하며, 퇴사하는 경우 내가 취할 수 있는 옵션들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지인의 지인을 통해 일손이 필요하다고 하는 곳의 면접을 보게 되었고, 다행히 통과하여 일을 할 수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역시 예상했던 대로, 현재의 처우 수준은 어느 정도 포기해야 하며, 대기업의 울타리는 더 이상 없을 것이다.
결국 선택은 퇴사였다.
선택하기까지도 쉽지 않았다. 물론 선택지에 대한 장단점을 고려하기도 하였지만, 그 이외의 요소들도 있었다. 우리 부모님은 평생직장으로 다니셨는데, 나는 이렇게 금방 퇴사라는 선택을 한다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왠지 모르게 '퇴사'라는 단어로부터 부담스러움과 새로운 시작에 대한 두려움도 느꼈다. 이런 수만 가지 감정들을 느끼며 용기 있는 선택을 하였다. 퇴사하고 새로 시작해 보자고.
첫 퇴사 과정은 순조롭지 않았다. 면담 과정에서 주눅 들기도 하고, 이렇게 해도 되는 건지 불안했다. 사례를 검색해 보고 주변에 알아보니, 어찌 됐든 회사에 퇴사를 알리고 나면 일정 기간 후에는 처리가 된다고 했다.
첫 퇴사를 하던 날, 고마웠던 상사분들과 동료분들께 인사하고 장비를 정리해서 반납하는데 왠지 모를 후련함이 몰려왔다. 마지막 부서에 같이 있던 분이 "이런 환한 표정은 처음 본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리고 감사하게도 이 회사에서 만난 좋은 분들도 너무 많았다. 부족하지만 감사의 마음을 최대한 표현하며 나는 새로운 길을 걷기로 했다.
돌이켜보면 그때의 선택은 용감했다. 사실 현실적으로 처우와 복지, 그리고 대기업의 울타리는 인생에서 굉장히 큰 디딤돌이 되는 부분인데 그걸 과감히 걷어찼으니까.
하지만 만약 그때 걷어차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재미있는 일을 해볼 수 있었을까?
10년간의 미국 생활을 정리하고 돌아와서 다시 적응해야 했던 그 시간들, 소속감 없이 부유하던 조직 생활, 그리고 데이터라는 새로운 호기심을 발견했던 순간까지. 모든 게 지금의 나를 만든 과정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때로는 안전한 울타리를 박차고 나가는 용기가 필요하다. 특히 호기심이라는 내비게이션이 새로운 방향을 가리킬 때는 더욱 그렇다. 물론 그 길이 항상 평탄하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내가 선택한 길'이라는 확신만큼은 분명하다.
지금 만약 용기가 필요한 선택 앞에 누군가가 서 있다면, 이 이야기가 작은 용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완벽한 답은 없지만, 자신의 호기심과 직감을 믿고 선택하는 것만큼은 틀리지 않는 것 같다. 막상 선택을 하면, 그 선택을 최고로 만들기 위해 나는 또 신나게 달려갈 것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