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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적응력이 없었는데, 있었다

선택이 나에게 가져다준 가장 예상치 못한 선물

by Dr Vector

나는 적응력 제로였던 사람이다

어린 시절의 나를 떠올려보면, 적응력이라는 건 정말 나와는 거리가 먼 단어였다. 매년 3월이 되어 새로운 반편성을 확인하고 새 교실에 들어서는 순간, 그 낯섦은 마치 차가운 바닷물에 갑자기 뛰어든 것 같은 느낌처럼 밀려들었다. 새로운 교실, 새로운 선생님, 새로운 자리, 새로운 친구들... 이 모든 것들이 나에게는 꽤나 오랫동안 어색하고 불편하게 느껴졌다.

그나마 한 동네에서 쭉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다닌 덕분에 학년이 올라갈수록 그 어색한 기간은 점차 짧아졌다. 전학이라는 더 큰 변화는 겪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의 나는 변화 자체를 두려워하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때는 잘 몰랐지만.


미국 유학, 나의 적응력을 시험하다

내가 정말로 적응력이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은 순간은 대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을 때였다. 말도 설고, 물도 설고, 사람도 선 그곳에 홀로 서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독립해서 혼자 살아보는 것도 처음이었고, 은행 계좌 개설부터 휴대폰 개통, 카드 만들기, 더 나아가 차량 구매, 집 렌트 계약과 같은 큰 이벤트까지 모든 것 하나하나가 한국과는 완전히 다른 시스템이었고, 그냥 평생 처음 해보는 것들 투성이었다. 해외여행이라고는 패키지여행으로 두세 번 다녀온 것이 전부였던 내게, 미국에서의 일상생활은 매일매일이 도전이었다.

그제야 깨달았다. 다른 동네에 있는 고등학교를 갔을 때 내가 왜 그렇게 어려웠는지, 대학교에 입학했을 때 즐거웠지만 한편으로는 뭔가 낯설었던 그 모든 감정들이 바로 낯선 환경에 대한 적응 과정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발견한 나만의 적응 공식

이런저런 시행착오와 힘겨운 순간들을 이겨내며 새로운 문화에 적응하기까지는 약 4~5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중요한 깨달음을 얻었다. 적응에는 원래 시간이 걸린다는 것, 그리고 그 시간 자체가 자연스러운 과정이라는 것을 받아들인 순간부터 마음의 안정을 되찾기 시작했다. 남들은 몇 달 만에 잘 적응하고 잘 사는 것 같은데 하는 생각도 떨쳐냈다. 다른 사람과의 비교는 나 스스로를 괴롭히는 일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 시절의 시행착오들이 충분한 배움의 시간이 되었던 것일까. 그 이후 환경이 바뀌는 순간마다 나는 조금씩, 확실히 나아지는 것을 체감할 수 있었다.


변화가 더 이상 두렵지 않게 된 순간들

미국에서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첫 회사생활을 시작했을 때, 회사를 그만둘 때, 이직할 때...

커리어에서 만나는 크고 작은 선택의 순간들마다, 적어도 변화에 대한 두려움 없이 선택의 순간을 마주할 수 있게 되었다.

만약 정말로 낯선 환경에 대한 적응력이 전혀 없었다면, 선택의 순간에서 변화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새로운 선택지를 만들어낼 수나 있었을까? 아마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선택이 나에게 준 가장 큰 선물

결국 그 수많은 망설임과 고민 끝에 내린 선택들, 그리고 내가 선택한 것을 최선의 선택으로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던 결과, 나도 모르게 조금씩 적응력이라는 소중한 능력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선택의 과정을 통해 과거와 현재, 미래에 대해 종합적으로 고민하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요소들을 면밀히 살피고, 측정할 수 있는 효과들을 파악하는 능력이 스무 살의 나보다 훨씬 더 성장했다.

그리고 선택한 후에는 뒤돌아보지 않고 그 선택의 장점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에너지를 집중하는 것도 몸과 마음으로 지금도 익혀 나가고 있다.


인생은 계속되는 선택의 연속이다

어차피 선택의 순간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계속해서 마주하게 될 것이다. 그때마다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 설정이다. 올바른 방향으로 한 걸음씩 나아가다 보면, 언젠가는 내가 원하는 길을 만나게 될 테니까.

만약 지금의 선택이 잘못되었어도 괜찮다. 그다음 선택의 순간, 바로잡는 선택을 하면 되지.

망설임이 나를 만들었고, 앞으로도 나를 만들어 나갈 것이다.

적응력이 없다고 생각했던 과거의 나 자신에게 고마워하며, 앞으로도 계속해서 새로운 선택과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맞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이다.


지금 이 순간, 변화가 두려운 우리 모두에게는 숨겨진 적응력이 있을 것이다. 다만 아직 그것을 발견하지 못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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