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이 고장 나도록 일한다는 것
퇴사 후 구직 시장에 뛰어들었을 때만 해도 상황이 나쁘지 않았다.
지금과는 달리 데이터 사이언티스트와 관련한 잡 오프닝이 꽤 많았던 시절이었다. 대기업부터 유명 스타트업, 이름도 생소한 신생 스타트업, 영어로 일하는 것이 필수인 외국계 회사까지 닥치는 대로 지원했다.
서류 탈락의 연속이었지만, 면접도 수없이 봤고, 때로는 최종 합격까지 따내 연봉 협상 테이블에 앉기도 했다. 이미 두 번의 이직을 경험한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매번 시장 상황이 달랐기에 또 새롭게 배우는 것들이 많았다.
그렇게 들어간 새로운 회사. 다행히 경력을 충분히 인정받아 팀장 포지션으로 시작했다. 출퇴근이 편도 1시간 정도였고, 유연근무도 가능했다. 꽤나 괜찮은 업무 환경이라고 생각했다.
우리 팀은 내가 합류하기 전에 팀원들이 먼저 시작한 케이스였다. 팀원들이 진행하던 기존 업무 방식의 큰 틀은 유지하되, 더 효율적으로 운영될 수 있는 방향을 찾아나갔다. 개발팀과의 활발한 협업을 주도하고, 그동안 겪었던 고충들을 찾아내어 하나씩 해결해 나가며 시스템을 만들었다.
어느 정도 팀이 자리 잡은 뒤에는, 업무 범위를 확장할 수 있을 법한 기회가 생겨 팀원 채용도 직접 해봤다. 데이터 사이언티스트이자 중간관리자로서의 역할. 이 모든 과정이 내 시야를 넓혀주었고, 그동안 보지 못했던 관점들을 선사했다.
하지만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진행 중인 프로젝트에 문제가 생겨 경영진으로부터 따가운 시선을 받기도 했고, 관리하던 지표의 운영상 허점이 발견되었을 때는 곤혹스러운 상황에 처하기도 했다. 때로는 협업 부서들의 비협조적인 상황들을 조율하며 대화로 풀어나가야 했고, 안갯속에서 새로운 서비스를 기획하는 일에도 참여했다.
내가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업무의 범위는 넓었다. 업무 퍼포먼스를 고려하여 최대한 야근은 피하고 싶었기에, 근무시간 내내 초집중 상태를 유지했다. 회의를 다니고, 하나라도 놓칠세라 열심히 기록하고, 팀원들의 동기부여와 멘털 관리, 업무 피드백에도 정성을 쏟았다.
그런 나날이 계속되던 어느 날, 몸에서 이상 신호가 오기 시작했다.
뭔가 딱딱한 것이 만져졌다. 병원에 가보니 염증 덩어리라며 수술로 제거해야 한다고 했다. 조직검사 결과를 봐야겠지만 재발 가능성이 높다는 말도 덧붙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다리에 붉은 반점들이 생기면서 통증이 심해졌다. 사무직인데 다리가 아프다니. 스테로이드 주사를 맞으며 버텼지만, 약발이 떨어지면 또 주사를 맞는 일의 반복이었다. 동네 병원에서 종합병원으로 전원 되어 몇 번의 진료를 받았지만, 원인은 여전히 알 수 없었고 역시 스테로이드 약으로만 조절한다는 답변뿐이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1. 그만두기
장점: 그만두면 몸이 나아지지 않을까
단점: 그다음이 너무 막막하다
2. 버티기
장점: 월급을 받을 수 있고, 경력이 끊기지 않는다.
단점: 일의 퀄리티를 포기해야 하고, 몸이 더 안 좋아질 수도 있다.
정말 어려운 선택이었다.
그만두면 미래가 막막했다. 사실 단점이 뭔지 나열할 수도 없을 만큼 그냥 아무것도 알 수 없는 미지의 영역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몸이 고장 나면서까지 버텨야 하나 싶은 마음도 들었다.
결국 그만두기로 했다.
더 이상은 모르겠고, 건강을 되찾으려면 지금 상황에서 버티기는 어렵다고 판단했다. 아무 계획 없이, 일단 그만두었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그때의 선택이 옳았는지 틀렸는지는 아직 모르겠다. 다만 확실한 건, 몸이 보내는 신호를 무시하면서까지 일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당장 건강을 잃으면 앞날은 없는 것이니까.
때로는 과도한 책임감과 완벽주의가 사람을 벼랑 끝으로 몰기도 한다. 숫자와 데이터 뒤에 숨어 있는 우리 자신의 몸과 마음도 중요한 데이터라는 걸 그때 깨달았다.
당신의 몸은 지금 어떤 신호를 보내고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