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춤이 가르쳐준 진짜 성장의 의미
어느덧 마지막 퇴사로부터 1년이 다가온다. 사람들은 쉬는 시간이 느릿느릿 흐를 거라 생각하지만, 실상은 전혀 다르다. 쉼표의 시간은 일하는 시간 못지않게 빠르고 복잡하게 흘러간다. 다만 그 흐름의 방향이 조금 달랐을 뿐이다.
가장 먼저 한 일은 건강 관리였다. 날씨가 좋을 때는 집 근처를 산책하고, 그렇지 않을 때는 실내에서 가벼운 운동을 한다. 체력이 돌아오기까지는 예상보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피검사에서 부족하다고 나온 영양소들은 하나씩 찾아서 보충제로 채웠다. 면역력에 특히 신경을 쓰면서, 피곤할 때는 주저 없이 충분히 쉬었다. 일할 때는 "쉬면 뒤처진다"는 강박이 있었는데, 이제는 "쉬어야 앞서간다"는 걸 안다.
건강이 회복되니 다른 모든 일들이 차례로 제자리를 찾아갔다. 몸이 튼튼해야 마음도 튼튼해진다는 말이 이런 뜻이구나 싶었다.
이사를 하면서 미루어두었던 집 정리를 대대적으로 했다. 당근마켓으로 팔고, 나눔도 하고, 기부도 하면서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물건들과 작별했다.
물건 하나하나에 얽힌 기억들을 되짚어보니, 내가 어떤 시간들을 살아왔는지 선명해졌다. 어떤 것들에 의미를 두고 살았는지, 무엇을 소중히 여겼는지도 보였다. 공간이 아주 약간 깔끔해지니 생각도 정리되는 기분이었다. 물론, 아이 있는 집이라 지금도 정리의 손길이 필요한 곳이 많이 남아 있지만.
이제 집은 진짜 '집'이 되어가는 것 같다. 단순히 잠자리가 아니라, 나를 회복시켜 주는 안전한 공간 말이다.
가능한 한 외식이나 배달음식을 줄이고 있다. 물론 요리 재능은 여전히 없어서 가공식품의 도움을 많이 받지만, 신선한 식재료를 활용하는 빈도가 늘었다.
음식 재고 관리도 훨씬 나아져서, 상해서 버리는 음식들이 확실히 줄었다. 그리고 쌀 소비량이 눈에 띄게 늘었다. 밥을 직접 해 먹으니 자연스레 한식 위주의 식단이 되었고, 몸도 한결 가벼워졌다.
작은 변화지만 하루 세끼를 스스로 책임진다는 것에서 오는 성취감이 있다. 누군가 차려준 밥이 아닌, 내가 나를 위해 준비한 밥의 맛은 다르다.
틈이 날 때마다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읽는다. 온라인 글도 예전보다 훨씬 많이 읽으려고 노력한다. 평일 낮에 시간이 있으니 동네 도서관이 이렇게 잘 운영되고 있었나 새삼 놀랍다.
근처 서점도 자주 들러 어떤 책들이 새로 나오는지 살펴본다. 혼자만의 시간에 온전히 빠져들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블로그와 브런치를 통해 생각을 글로 표현하는 연습도 꾸준히 하고 있다.
읽고 쓰는 시간이 늘수록 내 안에서 뭔가가 다시 자라나고 있음을 느낀다. 일에 매몰되어 있을 때는 잊고 있던 나만의 목소리를 되찾아가는 기분이다.
무엇보다 아이가 가장 좋아한다. 학교생활을 더 자세히 알 수 있고, 공부 방향이나 자습을 충분히 지원할 수 있다. 준비물도 꼼꼼히 챙길 수 있고, 갑자기 발생하는 일들에 대응하는 것은 이제 식은 죽 먹기다.
방학 동안에도 걱정 없이 아이와 시간을 많이 보냈다. 평일 오후,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와 나눈 수많은 대화들이 쌓여서 우리 관계는 훨씬 단단해졌다.
아이는 내가 집에 있으면서 더 안정감을 느끼는 것 같다. 그리고 나 역시 아이의 성장을 바로 옆에서 지켜볼 수 있어서 행복하다. 이런 시간은 돈으로도 살 수 없는 선물이다.
건강이 어느 정도 회복된 후부터는 다양한 회사들을 만나고 있다. 지원도 하고, 제안도 받으면서 새로운 기회들을 탐색 중이다.
나와 결이 잘 맞고, 내가 의미 있게 기여할 수 있는 곳을 찾기 위해 신중하게 생각하고 있다.
아니면 내가 스스로 무언가를 만들어보는 것도 고민 중이다. 일의 형태나 종류에 대해서도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두고 다음 커리어를 준비하는 것이 요즘의 가장 큰 관심사다.
예전에는 '빨리' 다음 직장을 찾아야 한다는 조급함이 있었다면, 이제는 '잘' 선택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걸 안다.
어려운 건 아니어도 조금씩 온라인 강의를 듣는다. 혼자 작은 프로젝트를 만들거나, 뉴스레터를 읽으면서 뒤처지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급변하는 세상에서 완전히 멈춰있을 수는 없다. 하지만 이전처럼 정신없이 따라가는 게 아니라, 내 속도로 꾸준히 걸어가는 느낌이다.
생각보다 하루 중 온전히 나에게만 몰입할 수 있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하지만 조금씩이라도 집중해서 뭔가를 할 수 있는 시간을 갖는 것 자체가 큰 치유가 된다.
아직 내게는 할 수 있는 일이 많고, 여전히 잘할 수 있는 일들이 있다. 그래서 무언가에 몰두할 수 있는 다음 기회가 필요한 시점이다.
지금 이 멈춤의 시간들에 내가 뿌린 씨앗들이 어디선가 싹을 틔울 수 있기를 바란다. 이 시간이 헛되지 않도록, 새로운 기회를 스스로 만들어가고 있다.
퇴사 후 1년을 돌아보니, 쉼표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위한 준비였다. 멈춤은 포기가 아니라 더 나은 도약을 위한 도움닫기였다. 그리고 나는 이제 다시 뛸 준비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