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의 기로에서 여전히 헤매는 현실
박사님, 이제 팀장 하실 때 됐는데요.
나는 공학으로 박사학위를 마치며 기술 전문성을 쌓았다. 그리고 몇 개의 회사를 거치며 다양한 포지션을 경험했다. 대기업의 작은 톱니바퀴로, 스타트업의 멤버로, 그리고 중간관리자로까지.
어느 순간부터는 이런 말을 듣기 시작했다.
"박사님, 이제 팀장 하실 때 됐는데요."
"경력도 있으시고, 후배들을 이끌어 주셔야죠."
기술에 몰두하고 싶은 마음과 조직에서 요구하는 역할 사이에서 갈등이 시작됐다. 그리고 깨달았다. 이것은 나만의 고민이 아니라는 것을.
지금까지의 여정을 돌아보며 앞으로의 커리어를 고민하다 보니, 한국의 기술직 직장인들이 마주하는 공통된 딜레마가 선명하게 보인다. 바로 '기술전문가'와 '매니저', 두 갈래 길 중 어느 것을 선택할 것인가 하는 문제다.
이는 단순한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한국이라는 특수한 환경에서 기술자로 살아남기 위한, 그 누구도 명쾌하게 답해주지 않는 생존 전략의 문제다.
산업계에 첫발을 내디디면, 학부 또는 대학원의 전공분야에서 쌓은 백그라운드 지식을 바탕으로 기술직 주니어의 길을 걷게 된다. 이때가 가장 중요한 시기다. 내 전문분야에 집중하는 것이 물론 필수적이지만, 의외로 넓은 범위의 경험이 나중에 큰 자산이 된다.
왜일까? 기술은 살아있는 생명체와 같다. 트렌드에 따라 변하고, 새로운 패러다임이 등장하면 기존의 것들이 obsolete 해진다. 여러 방향으로 경험치를 쌓아두면, 이직이나 새로운 기회를 찾을 때 선택의 폭이 넓어진다.
단순히 경험만 쌓는 것이 아니다. 이력서에 넣을 만한 눈에 보이는 결과물을 만드는 것이 핵심이다. 논문 한 편, 특허 하나, 프로젝트 하나라도 구체적인 성과가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도움이 된다.
시니어가 되면 게임이 바뀐다. 스킬이 폭넓게 쌓이고,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지면서 가시적인 성과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다. 이때부터는 개인적인 성과도 중요하지만, 영향을 미치는 범위가 핵심 지표가 된다.
"어느 조직에서 어떤 성과를 냈는지"가 이력서의 대문 역할을 한다. 이직 시장에서도 경력을 바탕으로 한 즉시 전력감의 여부가 최대 무기가 된다. 새로운 시스템의 전체 설계를 고안하거나, 복잡한 문제를 경험치로 해결하는 능력이 극대화되는 시기다.
자연스럽게 테크 리더로서의 역할이 커진다. 기술적 의사결정을 주도하고, 주니어 멤버의 실무를 가이드하며, 드물게는 조직의 기술 방향성에 의견을 제시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맡게 된다.
하지만 여기서 한국적 현실이 발목을 잡는다. 기술만 전문으로 하면 조직 내 성장에 한계가 있다는 점이다. 한국 산업계에서는 어느 정도 이상의 기술 전문성에 대한 필요성을 크게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 어느 정도라는 게 주관적이고 분야마다 차이가 있겠으나, 생각보다 금방 포화 지점에 다다르는 듯하다.
결국 시니어 기술전문가부터는 매니징 능력과 소프트스킬을 요구받기 시작한다. 순수한 기술자로만 성장하기에는 구조적 한계가 존재하는 것이 현실이다.
매니저로서의 성장은 기술전문가와는 완전히 독립적인 path다. 여기서 요구되는 스킬은 기술적 깊이보다는 조율과 관리의 예술에 가깝다.
매니저의 핵심 역할을 정리하면:
일감 정의와 배분: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명확히 하고, 적재적소에 배분하기
데드라인 관리: 나와 팀원들의 시간이라는 자원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품질 관리: 중간중간 체크하여 원하는 산출물이 나오도록 하기
이슈 해결: 문제 발생 시 협업을 주도하여 해결책 찾기
팀원 동기부여: 팀원들이 최대 퍼포먼스를 낼 수 있는 환경 조성하기
프로젝트 매니지먼트와 휴먼 리소싱의 복합체라고 할 수 있다.
안타깝게도 한국에서는 연차가 쌓이면 양방향 능력을 모두 요구받는다. 파트나 작은 팀이 생기면 자연스럽게 적합한 시니어에게 팀을 맡기는 것이 일반적이다. 나이가 차서 팀 운영 경험이 없으면 오히려 경력상 마이너스 요소로 작용한다.
반면 미국은 다르다. 테크 트랙과 매니저 트랙을 본인이 선택할 수 있고, 테크 트랙에서도 충분히 성장하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 구조다. 선택의 자유가 있다.
일부 기술 전문가들은 기술적 성장에 특화된 사람들이다. 매니징 스킬이 상대적으로 약하거나, 아예 선호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문제는 이런 경우 한국에서 경력을 더 발전시키기가 힘들다는 점이다.
선호하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해야 하고, 그 과정에서 다양한 부작용이 발생한다:
소통의 문제
팀원과의 소통이 어려워진다
지나치게 독단적이거나 반대로 우유부단해진다
협업 팀과의 마찰이 생긴다
업무 관리의 문제
일감 매니지먼트가 서툴러진다
데드라인을 맞추지 못해 프로젝트에 차질이 생긴다
전문성에 맞지 않는 업무 배정으로 전체 효율성이 저하된다
기술전문가 아니면 매니저. 특성이 완전히 다른 두 가지 트랙 사이에서 많은 기술자들이 고민한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보면, 한국에서는 둘 다 어느 정도 잘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런 고민 자체가 의미가 있을까?
결론적으로, 완벽한 선택은 없다. 하지만 자신의 성향을 파악하여, 강점은 더욱 강화하고 부족한 부분은 계획적으로 보완하는 전략이 필요하다.
기술 지향적인 사람이라면:
기술적 깊이를 유지하되, 최소한의 매니징 스킬도 함께 기른다
테크 리드 역할에서 시작해서 점진적으로 관리 경험을 쌓는다
해외 기업이나 외국계 회사도 적극 고려한다
관리 지향적인 사람이라면:
기술에 대한 이해도를 지속적으로 업데이트한다
기술자들과의 소통 능력을 중점적으로 기른다
비즈니스 관점에서 기술을 바라보는 시각을 개발한다
박사학위를 받고, 여러 회사를 거치며 느낀 것은 커리어에는 정답이 없다는 점이다. 하지만 자신을 정확히 파악하고, 환경을 이해한다면 최선의 선택은 할 수 있다.
한국의 기술자로서 살아가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이 딜레마를 인정하고, 전략적으로 접근한다면 자신만의 길을 만들어갈 수 있다고 믿는다.
결국 중요한 것은 지속적인 성장과 유연한 적응력이다. 기술전문가든 매니저든, 변화하는 환경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 것이 핵심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만의 스토리를 만들어가는 것이 중요하다. 남들과 다른 길을 걸어도 괜찮다. 중요한 것은 그 길에서 의미 있는 가치를 창출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