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츠 카프카의 『변신』
그레고르 잠자는 어느 날 아침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자신이 잠자리 속에서 한 마리 흉측한 해충으로 변해 있음을 발견했다.
아주 오래간만에 카프카의 『변신』을 꺼내 읽었다. 어릴 적엔 별 생각 없이 읽었다. 그저 하룻밤 새 벌레가 되어버린 사람의 슬픈 이야기 정도로 치부하며 읽었을 것이다. 하지만 성인이 되어 다시 읽은 『변신』은 정말이지 색달랐다.
이 책은 내게 ‘너도 벌레가 될 수 있어’라고 말하는 듯 했다.
안타까운 건 그레고르 잠자뿐만이 아닐지도 모른다.
주인공은 그레고르지만 우리는 그레고르의 가족에 주목해보아야 한다. 초반부, 그레고르가 출근할 시간에 제때 출근하지 않고 방문을 걸어잠그고만 있자 모든 가족이 문 앞으로 찾아와 애원한다. 왜 애원할까. 그레고르가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밥값을 벌어다줘야 마땅한 사람이 엄청난 사고를 일으켜버렸으니까. 이러다 해고 당해버리면, 영영 ‘기능’할 수 없을 지도 모르니까. 가족을 위해 희생해오다 5년만에 처음으로 이런 일을 벌인 그레고르에게.
그렇다고 가족이 그레고르를 밥벌이수단으로만 보았냐, 하면은 그건 또 아니다. 그저 가족으로 여기냐, 혹은 밥벌이수단으로 보느냐에서 둘의 비중이 조금, 아니 많이... 달랐을 뿐이다. 가족들은 그레고르가 끔찍하고 커다란 벌레로 변해 ‘기능’하지 못하게 되었음에도 그레고르를 내치지 않는다. 이들은 어쨌거나 희생한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역겨움을 참아가면서.
누이동생은 ㅡ끔찍하다는 태도는 숨기지 못하지만ㅡ 그레고르에게 밥을 제공하고, 때로는 방을 청소해주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누이동생의 도덕적 우월감에서 비롯된 것. 시간이 지날 수록 어땠나. 누이동생은 점차 그레고르의 방이 더러워져도 신경쓰지 않고 냅둔다. 그레고르가 어떤 밥을 좋아하는지 신경쓰던 초반과는 달리 후반에서는 아무 밥이나 대충 던져준다. 청소를 하지 않고 있다가 엄마가 한 번 치우니까 그제서야 엉엉 울면서 왜 내 기회를 앗아가냐고 따진다. 그레고르의 방을 치워야 하는 건 오직 자신이어야만 하니까. 그야말로 위선. 가족들은 점차 ‘저것을 어떻게 치울지’ 논의하고, 그레고르의 방에 필요없는 물건들을 쌓아두기 시작한다.
당장 쓰이지 않는 것들. 그레고르 같은 것들. 그레고르를 가장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배고픔보다 외로움이었다.
그리하여 옆에서는 여자들이 눈물을 섞거나 아니면 눈물조차 없이 식탁을 응시하고 있는데 자기는 다시금 어둠 속에 있을 때면, 그레고르는 등허리의 상처가 처음처럼 아파왔다.
그레고르를 치워버릴 명분을 꾸준히 찾아오던 가족들은 그레고르가 하숙인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사고를 일으키자 쌓여있던 울분을 터뜨린다. 동생의 바이올린 소리를 좀 더 듣고싶어 몸을 움직였던 그레고르에게.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완벽히 잃고 쓸모없는 벌레 그 자체로 전락해버린 그레고르. 바로 그날 그레고르는 고독 속에서 숨을 거둔다. 가족을 위해선 자신이 없어져버려야 한다고, 아주 단호하게 생각하면서. 그레고르의 죽음 이후가 하이라이트다. 가족들은 이때다 싶어 다같이 휴가를 낸다. 그레고르가 죽음으로써 자신들이 휴식을 취할 명분이 생긴 것에 기쁘기만 한 이들. 가정부가 그레고르의 죽음에 대해 자꾸만 이야기를 꺼내려하자 화를 내면서 ‘평온을 깨버렸다’라고 생각하기도. 그리고 가장 압권인 것은 마지막 문장.
그리하여 그들의 목적지에 이르러 딸이 제일 먼저 일어서며 그녀의 젊은 몸을 쭉 뻗었을 때 그들에게는 그것이 그들의 새로운 꿈과 좋은 계획의 확증처럼 비쳤다.
카프카의 『변신』은 그저 소설로만 치부하기에는 너무나 현실적이다. 나 역시 모종의 사고를 겪어 그레고르처럼 ‘기능’하지 못하게 되면 벌레만도 못한 취급을 받게 될테니까. 물질만능주의 사회에선 너도나도 벌레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실제로 우리가 자처해 그런 사회를 만들어가고 있음이 틀림 없다.
소중한 사람이 ‘기능’을 잃고 벌레와 같은 존재로 전락해버렸을 때 우리는 과연 그들을 버리지 않을 수 있는가. 지금에야 그저 상상 속 일이니까 ‘에이 어떻게 버려~’라고 생각할 수 있을지 몰라도 그게 현실로 다가온다면? 과연 장담할 수 있는가? 가족을 등한시하고 자기 자신의 사치를 더 가치있게 여기는 것이 바로 작금의 시대. 유교의 장점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단점만 남아버린 시대. 글을 쓰고 있는 나 역시도 이 시대에 일조하지 않는다고 말 할 수 없다.
카프카는 왜 그레고르를 하필 ‘벌레’로 만들었나. 그레고르는 가족을 위해 희생하며 기계처럼 일만 하는 ‘일벌레’였다. 그레고르가 흉측한 벌레로 변한 것은 그레고르의 실존적 위기를 표현한 것이다. 5년 동안 열심히 노예처럼 일만 하다 어느날 문득... 내가 왜 이러고 있는가, 와 같은 생각에서 비롯된 허무함. 이미 벌레같은 삶을 살고 있던 그레고르. 그리고 진짜 벌레가 되어 ‘기능’을 잃어버린다. 이윽고 가족에게서 자신이 그레고르라는 본질마저 부정당한다.
마지막 문장은 누이동생이 그레고르의 대체품으로서 새로이 ‘기능’하게 될 것을 의미한다. 우리 역시 그레고르와 같은 벌레가 된다 해도 그레고르의 누이동생마냥 우리를 대체할 누군가가 반드시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 가족에게 외면당한 채로 고독 속에서 죽어가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