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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건빵 Nov 06. 2024

상처받기 싫어서 무심하기를 택했습니다

기꺼이 감내할 수 있는 상처에 대하여

내향형 인간. 이런 타입을 보고 흔히들 저지르는 일반화의 오류가 있다. ‘내향성’을 ‘내성적인 성격’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이 두 단어는 엄연히 다르다. 내향성이란 에너지를 외부로부터 얻는 것이 아니라 내부로부터 얻는 것이다.  내성적인 성격이라 함은 자신의 생각을 겉으로 잘 터놓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많은 이들이 엠비티아이 첫글자가 I(내향적)로 시작하는 사람에 대해 ‘사람 대하기를 어려워할 것이다.’ 라고 예측한다. 하지만, 에너지를 얻는 방향이 다름을 뜻하는 외향성/내향성과 사회성 사이엔 명확한 상관관계가 없다.

나는 처음 만난 사람들과 대화를 잘 하는 편이다. 그래서 대개 내가 내향형 인간이라고는 생각지 못한다. 나는 그런 흔한 착각의 반례다. 내향적인 동시에 외성적인 유형이다. 최근 문득 그런 의문이 들었다. 나는 왜 처음 만난 사람이 편한가. 정확히는 아무 생각 없는 것에 가깝다고 할 수 있겠다.


고민하자 꽤 재미있는 답이 도출되었다. 나는 그간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아무도 모르게, 심지어는 나도 모르게 아주 두꺼운 선을 직직 긋고 있었는데, 그건 일종의 방어기제인 듯하다. 이 바운더리 안에 들어오면 넌 친구, 저 바운더리 안에 있는 너는 조금 친한 지인 정도, 그밖의 사람들에 대해선 별 생각 없음.

‘별 생각 없음’이 최소한의 예의조차 망각했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도 예의 갖춰 대하려 노력하며, 그 자리에서의 대화를 즐기려 하는 편이다. 하지만 그들에게 나의 신경을 크게 기울이며 대화하지는 않는다는 것이 다른 관계를 대할 때와의 큰 차이라고 할 수 있다. 적당히 피곤하지 않을 정도의 노력만을 들이고는 집에 가면 까맣게 잊어버리는 것이다. 나는 나의 이런 두꺼운 방어막을 능숙하게 숨길 줄 알아서, 더욱 외향적인 사람으로 보인다.


그런데 ‘친구’를 대할 때면 다소 극단적으로 변한다. 선 안에 들어온 이에겐 온 신경을 기울여 대화하며 그들의 행동 하나하나에 기민하게 반응한다.


이걸 놀랍게도 얼마 전 깨달았다. 내가 나에 대해 하고 있었던 착각. 그건 ‘나는 모든 이에게 둔하다’였다. 하지만 최근 들어 친구의 표정을 살핀다거나 대화의 맥락에서 느껴지는 모호한 기운을 탐지하려 노력할 때마다 스스로 조용히 놀라고는 한다. 


나는 대인관계에서 기울일 수 있는 노력의 그릇이 다소 작은 사람이라, 내 노력을 전부 선 안의 사람들에게 쏟아붓는 듯 하다. 처음 만난 이를 편하게, ‘생각 없이’ 대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가벼운 관계에서는 상처받고 싶지 않아 방어기제를 발동시키는 것.

사실 그릇이 커서 많은 이에게 사랑을 나눠줄 수 있는 사람이 부럽기는 하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내가 이런 사람인 것을. 결론은, 내가 내 그릇을 억지로 키우려다가는 탈이 날 것이 분명하니, 이미 가지고 있는 사랑이라도 친구들에게 더욱 세심히 베풀자는 것이다. 그들과의 관계에서 받는 상처는 기꺼이 감내할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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