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한 사랑의 실험』을 읽고
사랑은 가까이 갈수록 흐릿해지는 원시의 피사체다.
사실 나는 뻔한 사랑 이야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오해하지 말기를, 로맨스 소설은 좋아한다. 내가 싫어하는 건, 날 것의 문장만 나열하고선 아름다운 단어 ‘사랑’으로 포장하며 그럴듯한 척하는 글이다. 서사가 있는 글이라면 제대로 된 플롯을 갖춰야 하고, 사랑이라는 가치에 대해 논하는 글이라면 나름의 논리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마저도 갖추지 못한 애매한 사랑 글들이 넘쳐나는 세상이다. 왜냐하면 ‘사랑’이라는 단어는 그 자체만으로도 제법 있어 보이기 때문에.
얼마 전 문학평론가로서 저명한 신형철 평론가의 『정확한 사랑의 실험』을 읽었다. 독서모임에서 친구가 추천하여 읽게 된 책인데, 처음엔 제목만 보고서 좀 갸우뚱했다. ‘정확한’, ‘사랑’의, ‘실험’. 이 세 글자가 합쳐졌을 때 당최 무슨 이야기를 하려나 했다. 하지만 첫 장부터 취향을 완전히 저격 당하고야 말았으니! 저자는 나처럼 사랑 이야기에 지친 독자들이 많은 것을 알고 있었고, 그렇기에 더욱 사랑을 구체적으로 정의하고자 했다.
사랑에 대한 글은 이제는 읽기도 쓰기도 싫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사랑이라는 것이 실은 본능, 충동, 욕망 등이 변장일 뿐이라고 단정하며 짐짓 냉소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은 자신이 성숙하다고 믿는 미성숙한 소년들을 뿌듯하게 만들기는 하겠으나, 그것은 사랑에 대한 온갖 미신과 기만을 재생산하는 담론들 속에서 달콤하게 허우적거리는 것보다 더 생산적인 태도라고 할 수도 없다. 그래서 나는 사랑이 그것과 유사한 것으로 간주될 여지가 있는 본능, 충동, 욕망과 다른 것이라면 사랑이라는 감정 혹은 행위의 고유한 구조가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따져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이 세상에서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향해 할 수 있는 가장 간절한 말,
‘나도 너를 사랑해’라는 말의 속뜻은 바로 이것이다. ‘나는 결여다.’
저자는 ‘사랑해’의 속뜻이 바로 ‘나는 결여다’라고 말한다. 독서모임에서 이에 대해 이해하고자 한 차례 토론이 일어났다. 누군가 말했다. 그렇다면 이 책에서 말하는 ‘결여’는 ‘필요’가 아닐까. 이 사람이 나를 필요로 하면, 비로소 나를 사랑하는 것이 되는 것이지 않을까. 나는 이에 공감했다. 상대와 각자의 결핍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위안을 받았던 경험을 이와 연관지었다. 상대가 나를 사랑하는 이유가 결여에서 파생된 필요 때문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데 조심스레 다른 이가 반론을 제기했다. 필요야 말로, 저자가 사랑과 그토록 분리시키고자 했던 ‘욕망’과 이어지지 않나. 모두가 이 주장에 대해 공감하는 한편 혼란스러워졌다. 그럼, 필요도 욕망도 아니라면, 도대체 결여란, 그리고 사랑이란 무엇인가.
책 『정확한 사랑의 실험』은 문학평론가 신형철이 27편의 영화를 평론한 책이다. 말 그대로 영화를 평론하기 보다는, 이야기 속에 숨어 있는 인간의 비밀에 대해 더 정확하게 말하기 위한 노력을 담아낸 책이다. 시네필(Cinephil)이 아닌 나는 영화의 문법에 대해 잘 모르기에, 오히려 영화평론가의 영화평론보다 문학평론가의 영화평론이 더욱 와닿았다.
저자는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의 쓰네오가 조제를 단 한 번도 사랑하지 않았다고 결론지었다(이 영화를 좋아하는 나로선 다소 충격적인 주장이었다!). 쓰네오가 조제의 다리만큼의 결여를 제 안에서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쓰네오에게는 ‘없음’이 너무 없었기 때문에. 그러니까 저자가 정의하는 정확한 사랑은, ‘있음’으로 ‘없음’을 채우는 필요와 같은 것이 아니다. ‘없음’과 ‘없음’이 만나 그 자체로 견뎌질 때. 그게 사랑이라는 것이다.
이제 여기서는 욕망과 사랑의 구조적 차이를 이렇게 요약해보려고 한다. 우리가 무엇을 갖고 있는지가 중요한 것은 욕망의 세계다. 거기에서 우리는 너의 ‘있음’으로 나의 ‘없음’을 채울 수 있을 거라 믿고 격렬해지지만, 너의 ‘있음’이 마침내 없어지면 나는 이제는 다른 곳을 향해 떠나야 한다고 느낄 것이다.
반면, 우리가 무엇을 갖고 있지 않은지가 중요한 것이 사랑의 세계다. 나의 ‘없음’과 너의 ‘없음’이 서로를 알아볼 때, 우리 사이에는 격렬하지 않지만 무언가 고요하고 단호한 일이 일어난다. 함께 있을 때만 견뎌지는 결여가 있는데, 없음은 더 이상 없어질 수 없으므로, 나는 너를 떠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물론 영화에 대한 저자의 해석이 무조건적으로 정답이라는 것은 아니다. 개인에 따라 해석은 충분히 달라질 수 있다. 하지만 사랑에 대한 저자의 정의를 이해시키려는 수단으로써 충분히 그 역할을 잘 해주었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나는 사랑을 제대로 정의하려고 시도해본 적이 없다.
‘나는 결여다’. 나는 이 말을, 너와 나의 ‘없음’이 서로를 통해 채워질 필요가 없다는 것으로 이해했다. ‘없음’은 그 자체로 소중하기 때문에. ‘없음’을 마이너스로 여기는 일반적 통념과는 달리, 사랑에서 만큼은 플러스라는 것이겠지. 반면 너의 ‘있음’으로 나의 ‘없음’을 채울 수 있는 거라 믿는다면 그건 더 이상 사랑이 아닌 욕망일 것이다. 내가 해온 사랑은 진실된 사랑인지, 욕망에 가까웠던 것인지 스스로 물음을 던져본다. 독자분들도 이번 기회에 사랑의 논리학에 대해 각자의 방식으로 생각을 정립해본다면 꽤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내게 될 지도 모른다.
사랑은 역시 어렵다. 어려우니까 사랑인 것이고, 어렵기 때문에 뻔하디 뻔한 이야기더라도 결국 ‘사랑’ 한 글자면 끝나는 것처럼 여겨지는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