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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드라이클리너 Oct 25. 2022

예스잼을 찾아

“왜 와인바를 차리셨나요?”

손님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종종 듣는 질문이다. 내 생각에 이 질문에는 두 가지 함의가 존재한다. 먼저 하고많은 일 중에 왜 자영업을 택했느냐는 질문일 수 있겠고, 하고많은 술 중에 어쩌다 와인을 택했느냐는 질문일 수도 있다. 혹자는 콕 집어 왜 ‘내추럴 와인바’를 열었냐고 물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아무래도 자영업에 대한 질문보다는 술에 대한 질문일 가능성이 높겠다. 혹시 내가 모르는 다른 뜻이 숨어 있다면 제보해 주기 바란다.


어쨌든 내 대답은 간단하다. 재밌어 보였으니까. 술집을 차리면 재밌는 일이 왕창 벌어질 것만 같았다. 내추럴 와인을 팔기로 한 것도 재미 때문이었다. 가게를 열기로 한 시점에 가장 마시기 재밌는 술은 내추럴 와인이었다.


엔지니어가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 중 하나로 ‘함수 최적화’가 있다. 몇 가지 변수에 따라 하나의 값이 결정되는 함수로 문제를 모델링한 뒤, 변수를 조정하며 최적의 값을 구하는 방법이다. 함수가 간단하면 수학적 계산만으로 최적점을 찾는 경우도 있지만, 문제가 복잡하고 그에 따라 함수가 난해해질수록 컴퓨터에 계산을 맡겨야 한다. 컴퓨터는 당장 최선으로 보이는 방향으로 변수를 조금씩 조정해 가며 어딘지 모를 최적점을 향해 탐색을 반복한다. 


마치 눈을 가린 채로 산을 오르는 것과 같다. 정상에 오르기 위해서 일단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경사가 높은 방향으로 발걸음을 떼는 것뿐이다.


산을 계속 오르다 보면 어느 순간 더 오를 곳이 없어진다. 적당히 많이 올라온 것도 같고 이 정도면 산 꼭대기이겠구나 하는 느낌마저 든다. 최적점에 도착한 것이다. 그러나 지금 밟고 있는 곳이 그저 중간 봉우리인지 진짜 꼭대기인지는 모른다. 엔지니어의 용어로 바꿔 보면, 꼭대기에 미치지 못하는 중간 봉우리를 국소 최적local optimum이라 하고 진짜 꼭대기를 전역 최적global optimum이라고 한다. 전역 최적은 단 하나뿐인데 국소 최적은 수없이 많이 존재할 수 있다. 결국 어떤 봉우리에 도착했을 때 확률적으로 전역 최적보다는 국소 최적일 가능성이 높다.


사실 국소 최적 하나만 찾아도 문제는 대개 만족스럽게 해결된다. 엔지니어 입장에서는 굳이 리소스를 추가로 투입하면서 다른 최적점을 탐색할 이유가 없다. 애초에 컴퓨터에 내려진 명령으로는 한번 최적점을 찾고 나면 다른 최적점을 찾아 떠날 수도 없다. 산을 오르라고 시키면 군말 없이 계속 오를 줄만 아는 녀석이라 봉우리에 도착하면 도통 내려올 생각을 못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내 인생을 돌아보니 결국 ‘재미 함수’를 최적화하기 위해 고민하고 발버둥 치는 과정이었다. 재미 함수의 최적점이 어디에 있을지 모르기 때문에 일단은 당장 재밌어 보이는 무언가를 시작해 보곤 했다. 운이 좋았다면 첫 시도부터 전역 최적을 찾아 행복을 누렸겠지만 나는 로또 4등조차 당첨된 적 없는 ‘불운 인간’에 불과하다. 초반에는 기대만큼 재밌구나 싶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흥미를 잃기 일쑤였다. 그러다 더 재밌어 보이는 길이 눈에 들어오면 적당히 ‘환승’을 하며 살았다. 역시 인간은 컴퓨터와 다르다. 한번 찾은 최적점을 미련 없이 버리고 새로운 최적점을 꿈꾸며 탐색을 이어나갈 수 있다.


고등학교 때에는 그냥 재밌어 보여 기계공학을 전공으로 선택했는데 역학力學을 향한 관심이 시들고 코딩과 인공지능에 재미를 느껴 프로그래밍 공부를 시작했다. 학부 졸업 후에 박사까지 하겠다는 각오로 대학원에 들어간 것도 연구가 재밌어 보여서였지만 기대와 달리 연구는 ‘노잼’이었다. 연구실 바깥세상이 더 흥미로워 보여 눈을 돌려 봤더니 어느새 휴학도 했다가 후다닥 석사로 졸업하고 개발자로 일하게 되었다.


나도 내가 이런 선택을 하며 살 줄은 몰랐다. 어릴 때부터 뭐가 됐든 끈덕지게 한길만 바라보며 살아야겠다고 결심했는데 말이다. 각자의 분야에서 수십 년 동안 자신을 갈고닦으며 거장의 반열에 오른 사람을 동경했고, 스포츠 선수 중에도 낭만 가득한 프랜차이즈 스타나 ‘원클럽맨’을 좋아했다. 이제는 나도 이해를 따져가며 이적을 거듭하는 선수가 이해될 것도 같다. 영화 ‘인터스텔라’ 속 우주 비행사처럼 ‘밀러 행성’에 잠시 착륙했지만 어쩔 수 없이 떠나고, ‘만 행성’에도 잠시 착륙했지만 어쩔 수 없이 다시 떠나는 신세가 된 기분이다.



지금 소속된 조직에서 개발자로 일하는 것은 굳이 떠나고 싶지 않은 최적점이었다. 프로그래밍 공부가 어렵고 제조업계를 대상으로 제품을 만드는 게 어렵다고 징징거렸지만, 코드로 문제를 해결하고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며 성장한다는 즐거움이 더 크다. 어느 개발자 손님의 말처럼 개발자는 무한히 많은 문제를 만나는 사람이다. 이 문제들을 다 해결해낸다면, 아니 해결하지 못하더라도 그 과정에서 성장할 수 있다면 즐거움도 무한할 것이다. 직장 동료들도 워낙 착하고 뛰어난 사람들이라 같이 일하기에 과분할 정도로 좋다. 따박따박 통장에 박히는 월급을 보는 것도 그것대로 재밌다. 아무래도 학생 때와는 다르게 나이가 더 들었고 옆에 아내도 있으니 정기적으로 들어오는 월급을 선뜻 포기하기는 어렵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이 곧 재미가 되는 것 아니겠는가.



이런 상황에서 아내가 와인바를 열기로 마음을 먹었고 나도 함께하게 되었다. 이번에는 기존의 재미가 시들지 않았기에 다른 재미를 찾아 훌쩍 떠날 수가 없었다. 결국 내 결정은 개발자 일과 와인바 일을 ‘병행’하는 것이었다.


다행히 두 가지 일은 상호 보완적이었다. 와인바를 열지 않고 개발자로만 살았다면 경험해 보지 못했을 일, 느끼지 못했을 보람, 만나지 못했을 사람들이 떠오른다. 한 마디로 가게에서만 맛볼 수 있는 재미다. 한편 지금의 회사를 그만두고 와인바에 ‘올인’했다면 다시 직장으로 돌아가 코딩을 하고 싶어서 근질거렸을 것 같다. 현실적으로 봐도 회사에서 받는 안정적인 수입이 있었기에 그만큼 더 재밌는 콘셉트로 가게를 꾸리고 이벤트를 기획할 수 있었다. 두 가지 일을 병행하기 때문에 몸을 좀 갈아 넣고는 있겠으나 확실히 재미는 더 커진 셈이다. 자영업자로서 고된 일도 많고 고민도 많지만 그것마저 내 성장의 발판이라 생각하면 나름 쏠쏠한 재미다.


더 올라갈 곳 없는 최적점에 눌러앉아 있었는데 느닷없이 하늘에서 사다리가 하나 내려와 어찌어찌 다시 위로 올라가는 느낌이다. 이 사다리의 끝이 어떨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사다리 끝에 제법 괜찮은 최적점이 기다리고 있으리라며 ‘행복 회로’를 돌려 볼까 한다. 평소에 걱정이 많은 편인데 또 이럴 때에는 이상하리만치 낙관적이다. 


그러나 나의 이런 낙관도 영원하지는 못할 것이다. ‘균형의 수호자’가 되어야겠다는 다짐을 곱씹어 보지만 사다리에서 별안간 균형을 잃어 떨어질 수도 있고, 어쩌면 내 의지와 상관없이 사다리가 치워져 떨어질 수도 있다. 아니면 내가 먼저 와인바 생활에 지치고 흥미를 잃어 내 의지로 사다리에서 내려올지도 모르겠다.


지금 회사에서 개발자로 얼마나 더 일을 하게 될지도 결국 재미가 결정할 것이다. 언젠가 더 재밌는 일이 눈에 들어오면 슬쩍 고민해 보고 아니면 하던 일 계속하면 된다. 물론 재미 함숫값이 컸던 만큼 여기서 내려오면 짊어져야 할 리스크도 크다. 더 재밌을 줄 알고 도전해 본 일이 꽝일 가능성이 꽤 높다. 어쩌면 전역 최적에 가까웠던 곳을 버리고 그 반에 반도 안 되는 국소 최적을 향해 떠나는 형국이 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나는 제 발로 복을 걷어차는 줄 알면서도 끊임없이 새로운 재미를 좇을 것 같다. 애초에 이런 사람이 아니었다면 와인바를 시작조차 못했을 테다. 지금까지의 인생도 꽤 만족스러웠으니 앞으로도 비슷하게 살면 딱히 후회할 일은 없으리라 믿는다. 내일도 뭐 재밌는 거 없나 주변을 잘 살펴야겠다. ‘집돌이’ 주제에 재밌는 일을 찾는 데에는 무슨 역마살이 든 건지 불가사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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