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실인가? 회사인가?
연구와 업무의 그 모호한 경계
연구는 다른 말로 하면 “업무”와도 같습니다. 일반적인 이공계 일반대학원은, 일종의 소규모 회사와도 비슷합니다. 돈을 벌지요. 연구실의 비즈니스 모델은 다음과 같습니다. 연구용역을 수주함으로써 과제비를 유치하고, 이를 통해서 학생들 연구수당 (인건비)도 지급하고, 실험 기자재도 삽니다. 그 돈으로 회식도 하고 단합대회도 하지요.
연구 용역은 어떻게 수주할까요? 교수님의 지도하에 학생들은 실험을 하고, 논문을 씁니다. 특허를 내기도 하죠. 이를 국제 학술지에 게재하거나 학회에서 발표를 함으로써 연구 성과들이 널리 알려집니다. 기업체나 외부 기관에서는, 이런 연구 결과들을 보고서 자신들이 필요한 기술과 접목된다고 판단되면 연구실에 컨택을 하게 됩니다. “귀 연구실에서 가진 기술을 바탕으로, 저희 회사에서 필요한 ~~ 한 기술을 개발해 줄 수 있을까요?” 딜이 이루어지면 기업체에서는 연구실에 연구비를 지급하고, 연구실에서는 기업체에서 요구한 기술을 개발하기 위해 연구개발을 진행합니다. 이런 케이스를 산학협력연구라고 하지요.
정부에서 주도하는 연구용역은, 공모를 통해 뽑는 경우도 있습니다. 교육부나 과학기술부, 산업자원부 등의 정부 부처에서 연구과제를 모집한다는 공고가 나오면, 학교를 비롯한 각 연구 기관에서 자기들이 가진 기술을 바탕으로 제안서를 냅니다. 심사를 통해 뽑히면 수년간 연구비를 지원받으면서 해당 연구를 진행하게 되지요.
연구실이 회사처럼 돌아간다는 것은 이런 겁니다. 학생 개개인이 자기 학위 논문을 쓰기 위해서 자기가 하고 싶은 공부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이죠. 각 학생들은 “연구실”이라는 조직이 수주한 과제를 수행해야 합니다. 제안서를 써야 할 때도 있고, 연구결과 보고서를 써야 할 때도 있습니다. 이런 문서 작업은 다분히 행정적인 성격이 강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학생의 학위취득”을 위한 실험이 아닌, “연구실의 과제수행”을 위한 실험을 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산학연구를 하는 경우에는 회사에 출장을 가야 할 때도 있습니다. 회사 사람들과 만나서 회의도 해야 하고, 회식도 해야 하지요.
한 학생이 대학원에 입학하기 전부터 그 연구실에서는 이미 나름대로 연구 용역을 수행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연구 용역을 해야 연구실에 연구비가 있을 것이고, 연구비가 있어야 실험 기자재도 사고, 학생들 인건비도 지급할 수 있습니다. 연구과제비가 부족한 연구실은 실험 하나하나를 할 때마다 돈의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하고 싶은 연구를 제대로 못 하는 경우도 생길 수 있습니다.
어디든 인생이 비슷한 이치인 것 같습니다. 회사에서 하고 싶은 업무만 할 수 없듯이, 학교 연구실이라고 해서 자유롭게 자기가 하고 싶은 연구에만 몰두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결국 “연구실의 업무”와 “내 학위주제”를 잘 연결하는 지혜가 필요한데, 뒤에 또 이야기할 기회가 있겠지만 이는 많은 시행착오를 통해서 터득해야 하는 중요한 기술입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수년간 연구실 생활을 하다 보면, 소규모 조직이 돌아가는 생리를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됩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회사 생활을 미리 겪어보는 효과가 있지요. 연구실마다 분위기는 많이 다릅니다. 어떤 경우든간에 연구실이라는 조직 내에서 공동체 생활을 겪고 나면, 입사해서 적응이 빠른 것은 확실해 보입니다. 회사에서 만나는 여러 불합리들도, 대부분 연구실에서 겪은 것들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석사학위 과정을 제대로 마치고 들어온 신입사원들은, “연구”뿐 아니라 “조직생활”도 겪어본 사람이지요. 나름대로 회사에서 도움이 많이 되는 것만은 사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