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다시 생각해본다. 나는 왜 대학원에 갔을까? 돌이켜보면 환경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다. 형편이 어렵다 보니 장학금을 받으려고 열심히 공부했고 결과적으로 분수에 넘치는 학점이 남았다. 또, 미국으로 교환학생을 갔는데 정말 학교가 완전 시골에 있어서 정말 할게 없었다. 그러다 보니 한 연구실에서 연구보조 및 간단한 내 연구를 했고 미국 지도교수님이 도와주셔서 어떨 결에 1저자 논문까지 학부 생 때 발표했다. 정말 능력과 의지와 상관없이 운과 환경이 나를 대학원이라는 곳으로 밀어 넣어버렸다.
어처구니 없이 대학원 생활은 시작되었고 그 시작은 정말 힘들고 고통스러웠다. 그래도 나는 결과적으로 엄청난 퍼포먼스를 내며 졸업을 하였다. 어느 정도 괴물 같은 성과를 냈는지 돌이켜보니 정확하게 대학원 생활 시작 일년 만에 2010년 2월 17일에 첫 연구 논문이 나왔고, 세 번째 논문이 2010년 12월 27일에 나왔다. 만으로 일년도 안 되는 사이에 공식적으로 상당히 괜찮은 저널에 1저자 논문을 세 개나 쓴 것이다. 그리고 추후에 이미 2개를 더 쓰고 그 중 하나는 전혀 전공관련 분야도 아닌 영역을 따로 공부해서 1저자로 논문을 발표했다. 첫 논문을 검색해보니 현재 약 300번 인용이 되었다.
나는 어떻게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성과를 낼 수 있었을까? 이번에 집필한 일을 잘하기 위한 8가지 방법을 설명하는 <일취월장>의 사고(思考)편을 중심으로 내 대학원 생활을 복귀해본다.
1. 맥락적 사고
나는 그래핀(grapheme)이라는 신소재를 연구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 내 박사과정이 유독 힘들었던 점은 우리 지도교수님은 그래핀 관련 전공자가 아니어서 상당히 많은 부분을 내가 누구에 도움 없이도 스스로 개척했어야 했기 때문이다. 정말 처음 몇 달은 그냥 그만둘 생각만 매일 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이왕 시작한 거 “뭐라도 해보고 그만두자” 라는 마음에 열심히 시작했다!라고 말하면 좋겠지만 도저히 뭘 해야 될지를 몰랐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무엇을 연구했는지 조금 무식할 정도 엄청난 양의 문헌조사를 하기 시작했다. (대학원생이 이 글을 읽고 있는데 문헌조사가 뭔지도 모르면 정말 사태가 심각한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사태는 생각보다 심각하다는 것을….)
맨 처음에는 가장 권위 있는 저널부터 논문을 다운로드 받아서 읽기 시작했는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다. 그래서 맥락적으로 판단을 했다! 일단 디테일 보다는 무엇이 실험이 됐고 안됐는지를 파악하는 게 중요하기 때문에 초록과 그래프 중심으로 정말 권위 있는 저널 모든 논문을 다 봤다. 내가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그래핀이 발견 되어서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 된지 당시 4~5년 밖에 안 돼서 논문이 생각보다 많지는 않았다. 그래도 천 개 이상 훑었던 것 같다. 그러자 어떤 실험이 진행됐고 어떤 부분이 빈 구석인지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당시 어려운 논문 하나 붙잡고 계속 늘어지고 말았다면 나는 아마 박사 학위를 받지 못했을 확률이 크다. 맥락적 선택이 옳았다.
2. 시스템적 사고
그렇게 많은 엄청난 문헌조사를 하고 바로 내가 할 수 있는 실험과 그렇지 못한 실험을 분리하기 시작했다. 당시 나는 상당히 큰 규모의 연구센터 소속이었지만 장비가 셋업되고 있는 것들이 많아서 막상 내 실험 가용 범위는 그렇게 크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 실험실을 넘어서 학교 공용시설이나 돈을 내면 쓸 수 있는 학교 연구장비 리스트를 확인해서 정말 필요할 때 내가 쓸 수 있는 연구시설부터 파악했다. 그렇게 아이디어와 실험 가능 여부를 시스템적으로 사고하니 그리 크지는 않지만 교집합이 보였고, 나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빨리 실험해서 입학 일 년 만에 1저자 페이퍼를 쓸 수 있었다. 만약에 당시 막연히 좋아 보이는 아이디어만 연구주제로 고수했다면 논문을 빨리 쓰지도 못했고 결과적으로 졸업도 빨리 하지 못했을 것이다.
3. 재무적 사고
내 4번째 논문은 조금 특이하다. Thesis와는 상관없는 주제를 그냥 일을 하다가 어쩌다 보니 1저자 논문으로 쓰게 되었다. 배경은 우리 연구소가 제법 크다 보니 많은 계측 장비 회사들이 자신들의 제품을 팔려고 자주 방문했었다. 그리고 실력치를 보여주기 위해 우리가 보낸 샘플을 측정하여 그 결과값을 보내는 주는 경우가 많았다. 나도 몇 번 샘플을 달라고 해서 보내주었는데 결과가 생각보다 좋고 또 새로운 현상이어서 그냥 테스트로만 끝내기가 아까웠다. 샘플을 몇 개 더 보낼 테니 측정을 더 해달라고 장비 회사를 설득했다. 그리고 측정을 다 해주면 내가 주도적으로 논문을 쓸 테니 함께 공저자로 연구에 참여하자고 제안했다. 그렇게 논문이 나오면 자연스럽게 제품 설명에 훨씬 설득력이 생길 것이라고 학술적 제안이 아닌 재무적(비즈니스적) 제안을 한 것이다. 회사는 흔쾌히 내 제안에 응했고 나는 내 힘을 드리지 않고 수많은 샘플의 계측 값을 얻을 수 있었다. 당시 논문 주제는 그래핀의 마찰력에 관한 것이었는데 나는 마찰력에 관한 배경지식은 진짜 1도 없었는데 당시 미국에 있는 엔지니어와 이메일로 의견을 주고 받으면서 1저자 논문을 쓸 수 있었다. 그 논문도 현재 80번 정도 인용이 되었다. 이 연구는 논문은 Thesis에는 들어가지 못했지만 그래도 새로운 분야를 협업을 통해서 개척할 수 있었다는 의미에서 매우 좋은 논문이었다.
4. 통계적 사고
나는 박사과정 동안 총 5편의 1저자 논문을 발표했다. 마음먹고 썼으면 3편 정도는 더 1저나 논문을 쓸 수 있었지만, 후배들을 도와주고 실적이 없는 친구들에게 내가 하던 실험들을 많이 넘기기도 했다. 왜 그랬을까? 나는 졸업 후 회사에 갈 마음 밖에 없어서 딱히 연구실적이 많이 필요하지 않았다. 인턴을 하면서 입사한 사람들의 평균 실적을 보니 1저자 논문 5개 정도면 일단 양적인 측면으로는 충분히 상위 레벨이었다. 임팩트 팩터가 질적인 부분은 정확히 반영할 수는 없지만 내가 게재한 저널들의 임팩트 팩터도 그리 낮지 않아서 어딜 지원해도 입사에 문제는 없다고 나는 통계적으로 판단하였다. 그리고 후배들을 도와주면서 졸업논문을 쓰면서 내가 갈 회사에 관련 기술에 대한 공부를 좀 더 따로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내가 하던 연구를 이어받은 내 친구 칼론 박사는 결국 노벨상 수상자인 안드레 가임 교수와 공저로 연구 결과를 네이쳐 자매지에 발표했다. 물론 내가 시작한 실험이기 때문에 나도 영광스럽게 2저자로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 만약에 내가 욕심 내서 끝까지 했다면 그렇게 좋은 저널에 노벨상 수상자와의 공저는 생각도 못했을 것이다.
5. 반성적 사고
반성적 사고에 관련해서는 <일취월장>의 데일리 리포트 파트를 인용한다.
“맨 처음에는 점심시간이나 저녁 시간 혹은 퇴근 전에 기억을 떠올리면서 기록을 하다가 막상 그렇게 떠올리려고 하니 구체적으로 생각이 안 날 때가 많아서 두 시간마다 한 일을 적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단순히 어떤 일을 했는지 적다가 나중에는 몰입 정도를 Good/SoSo/Bad로 나누어서 추가로 적었다. 그렇게 처음 보름 정도 신경 써서 꼼꼼히 기록했다. 그리고 다시 기록을 살펴보았을 때 신박사는 많은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일단 직접 실험을 하지 않을 때는 몰입도가 낮다는 것을 알았다. 또, 실험할 때도 장비가 돌아가고 있으면 논문을 보거나 다른 일을 할 수 있는데, 그런 시간도 많이 낭비한다는 것이 보였다. 신박사는 평소에 실험 외 시간에 4~5시간은 공부한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신박사가 논문을 읽거나 교과서를 보는 시간은 정량적으로만 2~3시간이었고 집중도를 따졌을 때는 1시간 미만인 날도 많았다.
이렇게 체계적으로 매일 했던 일을 기록하니 어떻게 노력을 해야 하는지도 명확해졌다. 신박사는 어느 정도 기록하는 습관이 자리를 잡은 다음부터는 시간에 대한 개념이 새롭게 정립되어가는 것을 느꼈다. 우선은 시간을 허투루 쓰는 것이 상당히 불편했다. 연구노트에 집중 정도를 SoSo나 Bad로 적으면 뭔가 죄를 짓는 기분이었다. 그러다 보니 신박사는 Good을 기록하기 위해 의식적으로 더 많이 노력하게 되었다. 그리고 무조건 집중도가 높은 공부시간을 3시간 이상으로 늘리려고 노력했고, 실험 중 시간이 남을 때 논문을 보면 뭔가 시간을 정말 알차게 쓴 것 같아서 Best라고 적기까지 했다.” <일취월장, p96>
망할뻔한 박사과정을 구한 핵심 중에 하나는 바로 데일리 리포트다. 특히 나는 외국에서 거기다가 방목형 연구실에서 학위를 받다 보니 까딱하면 허송세월 보내기 딱 좋았는데 데일리 리포트를 통해서 나 자신에 대한 메타인지도 올릴 수 있었고 기록을 보면서 반성도 많이 하면서 무사히 박사학위를 받을 수 있었다.
글을 마치며
우선 대학원생 혹은 대학원에 관심 있는 분이 이 글을 읽었다면 <일취월장>에 “대학원에 가야 하나요?” 칼럼을 읽어보면 많이 도움이 된다. 그리고 대학원생은 <일취월장>의 “혁신”을 여러 번 읽어봐야 한다. 거기에 나오는 모든 상황과 이론을 대학원 기준으로 생각하여 관독을 하면 생각보다 연구에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3월 정도에는 <일취월장>을 읽은 대학원생들을 대상으로 <일취월장 대학원> 무료 강연을 진행해볼 계획이다. 대학원 생활에 관한 전반적인 내용과 간략하게 논문은 어떻게 쓰는 것인지에 대해 함께 이야기를 나눠보는 시간을 만들 예정이다. 열심히 연구하고 있는 대학원생들 모두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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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연 일은 어떤 방식으로 작용하고 어떤 방향으로 움직이는지, 또 우리는 그런 일에 대해 어떤 전략을 수립해야 하는지, 일의 본질을 이해하고 더 나아가 제대로 그리고 즐겁게 일하고 싶은 분들에게 <일취월장>을 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