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재학 시절에 미국 뉴욕주 포츠담이라는 작은 도시에 있는 클락슨(Clarkson) 대학교를 교환학생으로 갔다. 포츠담은 미국의 전형적인 University Town(대학 때문에 존재하는 도시)이었다. 그래서 내가 클락슨 대학교에서 할 수 있는 유일한 세 가지는 공부, 연구, 스컹크를 조심하는 일이었다.(워낙 시골이어서 학교 내에도 야생동물이 많이 돌아다녔다.) 그렇게 한가로운 시골 마을에는 클락슨 대학교 말고 뉴욕주립대 포츠담 캠퍼스가 또 있었다. 그 학교에는 미국 동부에서는 그래도 꽤 알려진 Crane School of Music이라는 음대가 있었는데 학생들이 정기적으로 무료 공연을 하였다. 클래식을 좋아한 것은 아니지만 워낙 할 일도 없고 해서(스컹크를 피하는 일보다는 의미 깊고 재미있을 것 같아서) 우연치 않게 공연을 갔다가 나는 오케스트라 연주회에 빠져들
어 버렸다. 그러면서 직접경험의 중요성의 깨달음을 얻었다. 연주회에 가서 그랬는지 깨달음의 전율이 왔다.
사람은 매질인 공기의 진동을 통해서 들을 수 있다. 매질의 진동이 고막으로 전달되고 고막의 진동은 청소골을 진동시킨다. 청소골의 진동은 달팽이관 안에 있는 청세포를 자극하고 청세포는 진동을 전기 신호로 바꿔 뇌로 전달된다. 우리 뇌는 그 전기 신호를 분석하여 소리를 듣는 것이다. 이런 소리의 전달 원리로 인해 우리의 가청 주파수 영역은 물리적으로 귀가 반응할 수있는 20~20000Hz가 된다. 보통 우리가 20~20000Hz 영역 밖은 들을 수 없기 때문에 일반 음원은 가청 영역 주파수 밖은 다 필터링하여 잘라낸다. 하지만 소리의 전달 원리에서 알 수 있듯이 소리는 진동으로 전달되기 때문에 우리가 가청 주파수 영역 밖을 듣지는 못해도 여전히 진동을 몸으로는 느낄수 있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현장에서 듣는 음악은 같은 음악을 이어폰으로 듣는 것에 비하여 더 큰 느낌으로 다가오게 된다. 그래서 실제 연주를 들을 때는 단순히 소리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분위기’가 다르다고 표현되는 것 같다.
실제로 공연장에서 들으면 더 감동이 큰 이유는 뇌과학으로도 설명될 수 있다. 결국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소리는 기계적 진동이 전기적 신호로 바뀌면서 우리의 뇌가 신호를 해석해서 듣는 것이다. 그래서 귀의 역할만큼 잘
들으려면 뇌의 역할이 중요하다. 소리를 담당하는 뇌의 영역은 대뇌반구 양쪽 가에 있는 측두엽이라는 곳이다. 측두엽에는 청각 연합영역과 청각 피질이 있어 청각정보를 처리할 수 있다. 흥미로운 점은 측두엽은 시각 정보처리도 관여한다는 사실이다. 측두엽은 시각피질에서 들어온 정보를 해석하여 우리가 무엇을 인지하고 있는지 판단하는 기능을 한다. 이렇게 측두엽이 청각뿐만 아니라 시각에도 관여를 하기 때문에 실제로 그냥 이어폰을 통해서 소리만 듣는 것이랑 직접 연주하는 모습을 보면서 음악을 듣는 것이랑 뇌의 활성화 정도가 차이가 나게 된다. 더 많은 자극을 통해 뇌가 더 활성화되고 신호를 더 능동적으로 해석하기 때문에 우리는 결과적으로 연주 현장에서는 더 큰 자극을 받는 것이다.
우리가 유한한 존재인 만큼 직접경험의 한계는 명확하다. 모든 것을 직접 경험한다는 것은 금전적으로 시간적으로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래서 사람들은 다양한 간접경험을 통해 물리적 한계로 인해 경험하지는 못하는 직접경험을 대신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데 있어서 직접경험 그리고 간접경험 모두 다 똑같이 중요하다. 우열의 문제가 아니라 그 역할이 다른 것이다. 하지만 직접경험의 기회가 있을 때는 무조건 직접 해보는 것이 좋다. 내가 오케스트라 연주에서 느낀 것처럼 직접경험에는 말로 설명 못 하는 느낌이 있다. 이 보이지 않는 느낌들은 공부를 아무리 열심히 한다고 얻을 수 있는 그런 부분이 아니기 때문에 직접 느껴 보는 것이 체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아마도 인생의 선배들이 말하는 논리를 넘어선 동물적인 육감은 이런 직접경험들의 누적으로 나도 모르게 생기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그렇게 나는 심장으로 스며드는 저음과 측두엽으로 파고드는 고음을 느끼면서 오케스트라 연주에 빠져들었다.
출처: <졸업선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