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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드라이트리 Nov 28. 2024

남해 버블과 최초의 주식회사 규제 (1720)

거품의 역사: 인류의 투기 열풍 (3화)

1720년 영국에서 발생한 남해 버블(South Sea Bubble)은 정부 부채, 독점 무역권, 그리고 주식 투기가 결합된 복합적인 금융 위기였다. 이는 단순한 투기 광풍을 넘어 현대 회사법과 증권규제의 토대를 마련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남해 회사(South Sea Company)의 설립은 당시 영국이 직면한 심각한 국가부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시도였다. 스페인 왕위계승전쟁(1701-1714)으로 인해 영국 정부의 부채는 천문학적 수준에 달했다. 이때 등장한 것이 로버트 할리(Robert Harley)의 아이디어였다. 정부 부채를 주식으로 전환하고, 그 대가로 회사에게 남미 무역의 독점권을 준다는 계획이었다.


1711년 설립된 남해 회사는 처음부터 실체가 모호했다. 스페인과의 아시엔토 조약으로 노예무역권을 획득했지만, 실제 무역은 매우 제한적이었다. 그러나 회사는 화려한 선전과 로비를 통해 투자자들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당시 영국인들에게 남미는 황금과 보물이 넘치는 미지의 땅이었고, 회사는 이러한 환상을 교묘하게 이용했다.


1720년 초, 회사는 더욱 대담한 계획을 제시했다. 영국 정부의 모든 부채를 인수하겠다는 제안이었다. 의회는 이를 승인했고, 이른바 '대전환(The Great Conversion)'이 시작되었다. 국채 보유자들은 자신의 채권을 남해 회사의 주식으로 바꿀 수 있었다. 회사는 정부보다 높은 이자율을 약속했고, 주가 상승에 대한 기대감도 컸다.


투기 열풍은 순식간에 번져나갔다. 1720년 1월 128파운드였던 주가는 6월에 1,050파운드까지 치솟았다. 런던의 체인지 앨리(Exchange Alley)는 주식 투기의 중심지가 되었다. 모든 계층이 투기에 뛰어들었고, 새로운 회사들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심지어 "사업목적 미정인 매우 유망한 사업"이라는 광고로 투자금을 모집하는 황당한 회사도 있었다.


아이작 뉴턴조차 이 광풍에 휘말렸다. 그는 초기에 7,000파운드의 수익을 올리고 빠져나왔지만, 다시 뛰어들어 결국 2만 파운드의 손실을 보았다. 후에 그는 "나는 천체의 움직임은 계산할 수 있지만, 인간의 광기는 계산할 수 없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러나 1720년 8월, 버블은 터지기 시작했다. 회사 이사들의 주식 매도가 감지되면서 투자자들의 신뢰가 무너졌다. 9월이 되자 주가는 급락했고, 연말에는 100파운드 이하로 떨어졌다. 수많은 투자자들이 파산했고, 일부 이사들은 재산을 몰수당했다. 이 과정에서 당시 재무장관이었던 로버트 월폴(Robert Walpole)이 위기수습에 나섰는데, 그의 냉철한 대응은 그를 영국 최초의 사실상 총리로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의회의 조사 결과, 광범위한 부패와 내부거래가 드러났다. 회사 이사들은 정치인들에게 뇌물로 주식을 제공했고, 허위 회계로 투자자들을 기만했다. 조지 1세의 정부각료들까지 연루된 이 스캔들은 영국 정치사의 큰 오점으로 기록되었다.


이 사건의 결과로 1720년 의회는 '버블법(Bubble Act)'을 제정했다. 이는 허가받지 않은 주식회사의 설립을 금지하는 세계 최초의 회사 규제법이었다. 비록 이 법이 오히려 영국의 산업혁명을 저해했다는 평가도 있지만, 이는 현대 증권규제의 시초가 되었다.


남해 버블은 현대 금융시장에 많은 교훈을 남겼다. 첫째, 정부 부채의 민간 전환이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둘째, 정경유착이 금융시장을 왜곡시키는 메커니즘을 드러낸다. 셋째, 투명성과 규제의 중요성을 일깨운다. 특히 회사의 실체와 사업모델에 대한 면밀한 검증이 필요하다는 점은 오늘날 수많은 스타트업과 가상화폐 투자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2008년 금융위기나 최근의 핀테크 버블을 보면서 우리는 300년 전 남해 버블의 그림자를 발견하게 된다. 금융혁신이라는 미명 하에 벌어지는 투기와 사기의 메커니즘은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다. 결국 남해 버블은 우리에게 새로운 금융상품이나 비즈니스 모델을 평가할 때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교훈을 준다. "황제의 새 옷"을 꿰뚫어 보는 냉철한 시각이 필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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