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품의 역사: 인류의 투기 열풍 (4화)
1929년 대공황은 단순한 주식시장의 붕괴를 넘어 현대 자본주의 역사상 가장 극적인 경제위기였다. '광란의 20년대'로 알려진 1920년대의 호황이 처참한 붕괴로 이어지는 과정은, 규제받지 않는 자유시장 자본주의의 취약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사건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공황 이전까지 전례 없는 번영을 구가했다. 새로운 기술혁명의 물결이 밀려왔다. 자동차, 라디오, 전화, 영화 등 혁신적인 제품들이 대량생산 체제를 통해 보급되었다. 헨리 포드의 컨베이어 벨트 시스템은 산업생산성을 극적으로 향상시켰고, 이는 노동자들의 임금 상승으로 이어졌다. 도시화가 가속화되었고, 중산층이 형성되었다.
금융시장도 극적으로 변화했다. 처음으로 일반 대중이 주식투자에 대거 참여하기 시작했다. 이전까지 주식투자는 부유층의 전유물이었지만, 1920년대에는 중산층까지 투자에 뛰어들었다. '고객의 고객까지 알아야 한다'는 말이 유행할 정도로 증권사들은 공격적인 영업을 펼쳤다. 특히 신용거래의 확대가 투기를 부추겼다. 주식 가치의 10%만 있으면 나머지는 빌려서 투자할 수 있었다.
기업들의 행태도 투기적으로 변했다. 지주회사들은 피라미드식 구조를 만들어 적은 자본으로 큰 기업을 지배했다. 투자신탁은 다른 투자신탁의 주식을 사들이는 식으로 거품을 키웠다. 일부 기업들은 자사주 매입을 위해 대출을 받고, 그 주식을 담보로 또다시 대출을 받는 순환구조를 만들었다.
1928년부터 연방준비제도(FRB)의 총재 벤자민 스트롱이 사망하면서 통화정책은 혼란에 빠졌다. 뉴욕 연준과 다른 지역 연준들 사이의 갈등으로 적절한 정책 대응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FRB는 투기 억제를 위해 긴축정책을 폈지만, 이는 오히려 실물경제를 위축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1929년 10월 24일 '검은 목요일'과 29일 '검은 화요일'을 거치며 시장은 붕괴했다. 주가 폭락은 신용거래의 강제청산을 불러왔고, 이는 다시 주가 하락을 촉발하는 악순환이 이어졌다. 1929년부터 1932년까지 다우존스 지수는 89%나 하락했다. 1,000만 명 이상이 파산했고, 실업률은 25%까지 치솟았다.
은행시스템도 연쇄적으로 붕괴했다. 1929년부터 1933년 사이에 9,000개 이상의 은행이 도산했다. 예금자들의 뱅크런이 이어졌고, 통화량은 3분의 1로 줄어들었다. 디플레이션이 심화되면서 채무자들의 실질 부담은 더욱 커졌다. 농산물 가격이 폭락하면서 농민들은 땅을 잃었고, 이는 존 스타인벡의 소설 '분노의 포도'의 배경이 되었다.
허버트 후버 대통령의 소극적 대응은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다. 그는 시장의 자정작용을 믿었고, 정부 개입에 반대했다. 1932년 대선에서 승리한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뉴딜 정책을 통해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했다. 글래스-스티걸법으로 상업은행과 투자은행을 분리했고, 증권거래위원회(SEC)를 설립해 금융시장 감독을 강화했다. 연방예금보험공사(FDIC)를 만들어 예금자를 보호했다.
대공황의 교훈은 현대 금융시스템의 근간이 되었다. 첫째, 금융시장에 대한 적절한 규제와 감독의 필요성이다. 둘째, 중앙은행의 최종대부자 역할의 중요성이다. 셋째, 경제위기 시 정부의 적극적 개입이 필요하다는 케인스주의적 관점의 등장이다. 2008년 금융위기 때 각국 정부와 중앙은행이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었던 것도 대공황의 교훈 덕분이었다.
그러나 1999년 글래스-스티걸법이 폐지되고, 금융규제가 완화되면서 새로운 위기의 씨앗이 뿌려졌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는 대공황의 교훈을 잊은 대가였다. 현재 우리는 다시 한번 극단적인 저금리와 자산가격 거품이라는 도전에 직면해 있다. 대공황의 역사는 우리에게 금융시장의 안정성과 공정성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이를 위한 제도적 장치가 얼마나 필요한지를 계속해서 일깨워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