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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신의 흐름: 슘페터에서 개방형 혁신까지

창조적 파괴에서 R&D 전략과 개방형 혁신으로 이어지는 기술경영의 계보조

by 드라이트리

혁신이론의 흐름을 이해하는 일은 기업의 R&D를 단순한 비용 항목이 아니라 전략의 심장부로 바라보게 만드는 관점 전환의 출발점입니다. 기술경영에서 혁신은 특정 아이디어의 출현만을 뜻하지 않으며, 조직이 지식과 자본, 제도와 시장을 엮어 가치 창출 구조를 재구성하는 전 과정을 의미합니다. 이 글은 슘페터의 ‘창조적 파괴’에서 시작해 기술수명주기와 S커브, 지배적 설계와 기술 불연속, 파괴적 혁신, 흡수역량과 동태적 역량, 그리고 개방형 혁신에 이르는 사상적 계보를 잇고, 각 단계가 기업의 R&D 의사결정과 어떻게 맞물리는지를 서술합니다.


슘페터는 자본주의의 본질을 정태적 균형이 아니라 ‘끊임없는 내적 변형’으로 규정했습니다. 창조적 파괴란 새로운 결합이 기존의 결합을 무너뜨리는 과정이며, 경쟁은 가격경쟁보다 혁신경쟁에서 본질이 드러난다는 주장입니다. 슘페터 1형(Schumpeter Mark I)은 발명가·기업가가 금융을 결합해 신제품과 신시장을 여는 소규모 혁신의 역동성에 초점을 둔 관점입니다. 반면 슘페터 2형(Schumpeter Mark II)은 대규모 기업의 체계적 R&D 투입, 연구소 조직, 규모의 경제가 혁신의 주된 원천이 되는 관점입니다. 산업의 초기에는 1형의 기업가적 실험이 우세하고, 성숙기에는 2형의 조직적 탐색과 누적 학습이 생산성을 좌우한다는 통찰은 R&D 거버넌스의 설계를 암시합니다. 즉, 기업은 성장 단계에 따라 탐색 중심의 소규모 실험 포트폴리오와 대규모 축적형 연구 투자를 다르게 배합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기술수명주기와 S커브는 혁신의 시간적 단면을 보여줍니다. 새로운 기술은 초기에 성능 개선률이 완만하며, 학습과 설계 지식이 축적될수록 개선 속도가 가팔라지고, 물리적 한계와 설계상의 경직성에 부딪히면 다시 둔화되는 경향을 보입니다. 이 곡선을 오독하면 두 가지 오류가 발생합니다. 첫째, 초기의 느린 성능을 근거로 잠재력을 과소평가하는 오류입니다. 둘째, 성숙기의 높은 성능을 근거로 대체 기술의 급전을 과소평가하는 오류입니다. 따라서 R&D 포트폴리오는 단일 기술의 점진 개선에 집중하는 동시에, 현재 S커브의 상단을 뚫을 가능성이 있는 대체 S커브에 대한 탐색 옵션을 가져야 합니다. 지배적 설계의 등장은 이러한 곡선 전환과 밀접합니다. 산업은 일정 시점에 제품 구조와 인터페이스가 사실상의 표준으로 수렴하는데, 이는 생산성과 보급을 촉진하는 대신 혁신의 초점을 성능보다 비용과 품질 안정화, 공정 혁신으로 이동시키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때 기존 강자의 핵심역량은 ‘핵심 경직성’으로 변질될 수 있으며, ‘아키텍처 혁신’처럼 부품 성능은 유지하되 상호관계와 시스템 로직이 바뀌는 변화에 취약해지기 쉽습니다. 조직은 설계 규칙과 모듈 경계를 고정된 것으로 다루지 않고, 아키텍처 수준의 실험을 지속할 수 있는 엔지니어링 역량과 조직 구조를 갖춰야 합니다.


혁신은 연속적 진화만이 아니라 기술 불연속에 의해 진동합니다. 불연속은 공정·제품의 성능 프런티어를 한 번에 이동시키며, 기존의 지식 기반을 무력화시키기도 합니다. 기존 기업은 성과를 내는 현재 고객과 공정 KPI에 맞춰 자원을 배분하는 경향이 있어, 성능이 낮고 마진이 작아 보이는 신기술을 체계적으로 과소투자하는 문제가 반복됩니다. 파괴적 혁신은 바로 이러한 의사결정의 체계적 편향을 지적합니다. 파괴는 저성능·저가의 ‘로우엔드’ 진입 혹은 성능 필요치가 없는 ‘신시장’ 진입에서 출발하여 학습을 통해 주류 시장 기준을 추월하는 경로를 탑니다. 따라서 파괴를 막는 해법은 단순한 ‘더 많은 R&D’가 아니라, 기존 사업의 성과 논리에서 분리된 자원 배분 통로를 열고, 실험의 성과척도를 주류 고객의 현재 가치척도가 아니라 학습속도와 고객 창출지표로 재설계하는 일입니다. 이를 위해 기업은 내부 인큐베이터, 별도 손익(P&L), 소규모 다기능팀, 고객 개발과 빠른 피드백 루프 등 조직 메커니즘을 갖춰야 합니다. 동시에 모든 신기술이 파괴적이지 않다는 점도 중요합니다. 다수의 혁신은 ‘지속적’이며 기존 고객의 성능 요구에 부합합니다. 파괴적·지속적 구분을 사후적으로가 아니라 사전적으로 판단하기 위해서는 고객 세분의 성능 초과 여부, 가치 네트워크의 변동, 보급 경로의 차이를 정량적으로 추적하는 정보체계를 갖추는 것이 유효합니다.


R&D가 외부 지식과 만나는 방식은 혁신의 성패를 가릅니다. 흡수역량은 외부 지식을 인지·동화·활용하는 능력이며, 내부 R&D는 신지식 생산뿐 아니라 외부 지식의 해독장치 역할을 수행합니다. 따라서 단순한 기술 도입만으로는 역량이 축적되지 않으며, 내부 연구 기반과 학습 루틴이 결합될 때 외부 협력의 수익률이 높아집니다. 동태적 역량은 환경 변화를 감지하고, 기회를 포착하며, 자원과 프로세스를 재구성하는 조직적 능력을 뜻합니다. 이는 특정 기술에 대한 전문성만으로는 충분치 않음을 의미합니다. 시장 신호를 기술 로드맵으로 번역하는 감지 능력, 실험을 사업으로 전환하는 포착 능력, legacy 자원을 해체하고 신규 아키텍처로 재배치하는 전환 능력이 함께 작동해야 합니다. R&D 조직은 이러한 능력을 뒷받침하기 위해 탐색과 활용의 균형을 구조적으로 설계해야 합니다. 탐색은 불확실한 영역에서의 학습과 옵션 확보를, 활용은 검증된 영역에서의 규모화와 효율을 뜻합니다. 두 영역의 균형은 예산비율만으로 정해지지 않으며, 평가·승진·성과보상, 프로젝트 게이트, 실험 인프라와 데이터 파이프라인 같은 제도적 세팅이 좌우합니다.


혁신의 경제적 수익은 기술 자체보다 ‘보완적 자산’에 의해 좌우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제조 역량, 유통 채널, 브랜드, 데이터와 표준, 규제 승인 능력 같은 자산이 없다면 우수한 기술도 수익화되기 어렵습니다. 반대로 특허와 영업비밀, 리드타임 등의 보호 체계가 약하면 후발 모방자가 수익을 가져갈 가능성이 높습니다. 따라서 R&D 전략은 기술 로드맵과 별도로 보완적 자산 로드맵을 병렬 설계해야 합니다. 예컨대 플랫폼 전략을 채택한다면 API와 SDK, 개발자 경험, 양면시장 보조금 구조, 표준화 참여 계획이 기술 로드맵과 결합되어야 합니다. 규제가 핵심인 산업에서는 임상·인허가 역량과 데이터 거버넌스가 기술 우위의 실현 조건이 됩니다. 데이터는 새로운 보완적 자산으로 기능하며, 모델 성능과 시장 네트워크 효과를 동시에 강화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데이터 독점은 외부 협력의 유인을 약화시키므로, 개방과 보호의 경계를 정교하게 설계하는 거버넌스가 필요합니다.


개방형 혁신은 기업 경계를 통해 지식이 유입·유출되는 경로를 제도화합니다. 인바운드는 라이선스 인, 합작, 스타트업 제휴, 크라우드소싱 등 외부 아이디어 유입을, 아웃바운드는 비핵심 기술의 라이선스 아웃, 스핀오프, 표준 기여 등을 통해 내부 지식의 외부 활용을 뜻합니다. 결합형 모델은 공동개발과 상호 라이선스가 얽힌 복합 구조를 가집니다. 개방형 혁신의 핵심은 ‘얼마나 열 것인가’가 아니라 ‘무엇을, 언제, 누구와, 어떤 지배구조로 열 것인가’입니다. 조기 단계의 모듈 인터페이스 공개는 보급 속도를 올리지만, 핵심 아키텍처의 과도한 공개는 이윤을 잠식할 수 있습니다. 기술 성숙도, 보완적 자산 보유 정도, 표준과 규제 지형을 함께 고려해 개방-보호의 균형점을 찾아야 합니다. 내부적으로는 기술 스카우팅과 기술가치평가, IP 포트폴리오 관리, 계약·컴플라이언스 능력이 결합되어야 개방형 혁신이 작동합니다. 외부적으로는 대학·연구기관, 스타트업, 고객과의 공동 실험이 학습속도를 높이며, 데이터·샌드박스 환경과 테스트베드가 결합되면 개방형 혁신의 수익률이 증가합니다.


R&D 관리의 일상으로 내려오면 의사결정은 지표와 프로세스의 문제로 환원됩니다. 특허 건수, 인용도, 신제품 매출비중, 출시 리드타임, 기술 성숙도 지표(TRL) 등은 서로 다른 목적의 지표이며, 단일 지표 최적화는 왜곡을 부릅니다. R&D 강도를 매출 대비 비율로만 볼 경우 경기순환과 회계정책에 휘둘릴 수 있으며, 성과의 시차를 고려하지 않으면 탐색 투자가 과소평가됩니다. 따라서 기업은 탐색·확산·규모화의 각 단계에 상응하는 선행지표와 후행지표를 결합하고, 프로젝트 수준의 리스크 조정 성과를 포트폴리오 차원의 리밸런싱 규칙과 연결해야 합니다. 스테이지-게이트는 위험을 구조화하는 장점이 있으나, 불확실성이 높은 영역에서는 반복적 실험과 고객 검증을 중시하는 애자일 접근이 유리합니다. 두 방식을 병행하려면 ‘게이트의 기준’을 문서 완성도가 아니라 학습 증거와 가설 검증 정도로 재정의하는 것이 효과적입니다. 또한 R&D를 비용이 아닌 옵션으로 간주하는 재무적 관점은 불확실성 하에서의 중도 철회와 확대의 합리성을 설명해 줍니다. 실험은 실패 확률이 높은 대신 실패 비용이 작아야 하고, 성공 가능성이 확인되면 신속히 자원을 확대하는 ‘규모화 스위치’를 미리 설계해야 합니다.


정책과 제도의 맥락도 혁신경쟁의 일부입니다. 국가혁신시스템은 대학·기업·정부의 삼중나선을 통해 지식과 자본이 흐르는 통로를 만듭니다. 공공 R&D는 높은 불확실성과 외부효과 때문에 민간이 투자하지 않는 영역의 탐색을 맡고, 표준화와 규제 샌드박스는 민간의 보급 리스크를 낮춥니다. 기업 입장에서는 보조금과 세액공제의 기회보다, 규제의 방향성과 데이터 이동성, 인재비자와 같은 제도적 변수들이 장기 로드맵에 미치는 영향이 더 큽니다. 따라서 R&D 전략은 기술만이 아니라 정책 시나리오를 내재화한 다경로 계획이 필요합니다.


AI의 부상은 R&D의 생산함수를 다시 쓰고 있습니다. 설계공간을 탐색하는 생성 모델, 실험 설계를 최적화하는 베이지안 최적화, 시뮬레이션과 물리 유도 신경망의 결합은 탐색 비용을 낮추고 학습 속도를 가속합니다. 동시에 데이터 품질, 재현성, 해석가능성, IP 귀속과 같은 새로운 거버넌스 문제가 등장합니다. AI는 탐색 단계에서의 가설 생성과 후보 축소에 강점을 가지지만, 검증 단계의 실험과 확산 단계의 제조 스케일업은 여전히 물리적 제약과 운영 역량에 의해 결정됩니다. 결국 AI는 R&D의 각 단계를 연결하는 ‘학습 파이프라인’을 고도화할 도구이며, 조직은 데이터 수집·정리·거버넌스 역량을 R&D 핵심 자산으로 다루어야 합니다.


혁신의 역사는 단절과 연속, 개방과 보호, 탐색과 활용의 진자운동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슘페터의 관점은 경쟁을 혁신경쟁으로 재정의했고, S커브와 지배적 설계는 시간과 구조의 함정을 보여주었습니다. 파괴적 혁신은 자원배분의 편향을 드러냈고, 흡수역량과 동태적 역량은 조직이 외부 지식과 변화를 다루는 능력이 핵심임을 강조했습니다. 개방형 혁신은 기업 경계의 설계를 전략 문제로 끌어올렸고, 보완적 자산과 제도 환경은 기술 우위의 수익화 조건을 규정했습니다. 기업의 R&D는 이 모든 통찰을 실천으로 번역하는 활동입니다. 기술을 고르고, 실험을 설계하며, 학습을 증거화하고, 자원을 재배치하는 반복을 통해 조직은 S커브의 상단을 넘어 새로운 곡선으로 이동합니다. 혁신을 이해한다는 것은 곧 이러한 이동을 우연에 맡기지 않고 설계하는 능력을 기르는 일이며, 그것이 기술경영이 추구하는 궁극의 역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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