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이 쓴다고 성공하지 않는다 — 연구개발의 효율성과 전략적 선택의 중요성
R&D 투자는 생산성, 특허 창출, 기업가치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기존 연구들은 R&D 지출이 일정 수준 이상일 때 기업의 총요소생산성(TFP)을 높이고, 특허 수와 인용도를 통해 혁신 성과를 측정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또한 투자자는 기업의 미래 성장 가능성을 평가할 때 R&D 지표를 중요한 신호로 간주하며, 이는 주가와 기업가치에도 반영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긍정적 효과는 단순한 ‘투자 규모’보다는 투자 효율성, 즉 같은 자원으로 얼마나 많은 혁신 성과를 내는가에 의해 좌우됩니다. 따라서 기업은 R&D 집약도(R&D Intensity)만 강조하기보다 연구개발 효율성을 함께 관리해야 합니다.
기업의 R&D 투자는 일정 수준 이상에서 체증 효과를 가져오지만,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오히려 한계효용이 줄어드는 현상이 나타납니다. 이를 흔히 ‘R&D 생산성 역설’이라고 부릅니다. 연구자들이 “적정 R&D 수준”을 논의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지나친 투자 확대는 조직 내 중복 연구, 관리 비용 증가, 실패 프로젝트 누적 등으로 오히려 성과를 약화시킬 수 있습니다. 반대로 지나치게 보수적인 투자는 신제품 출시 지연과 시장 기회 상실로 이어집니다. 따라서 기업은 R&D 예산을 단순히 늘리는 것이 아니라, 효율성을 높이고 투자 구조를 정교하게 설계하는 전략이 필요합니다.
R&D는 크게 기초연구와 응용연구로 나눌 수 있습니다. 기초연구는 즉각적인 성과와 연결되지 않지만, 장기적으로 기술의 근간을 마련하는 역할을 합니다. 응용연구는 시장성과 연계된 프로젝트로, 단기적으로는 매출과 직접 연결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기업에게는 이 두 가지의 균형이 매우 중요합니다. 기초연구를 소홀히 하면 기술의 뿌리가 약해져 장기적인 혁신 잠재력이 떨어지고, 응용연구만 강조하면 시장 변화에 빠르게 대응하기 어렵습니다. 구글, 삼성, IBM 같은 글로벌 기업들이 장기적 기초연구와 단기적 응용연구를 동시에 운영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기업이 혁신을 주도하는 방식에는 내부 연구개발과 외부 기술도입이 있습니다. 내부 R&D는 조직적 학습과 독창성 확보에 강점이 있지만, 속도와 다양성에서 한계가 있습니다. 반대로 외부 기술도입은 빠르게 신기술을 확보할 수 있으나, 이를 흡수하고 재조합할 능력이 없다면 실질적인 성과로 연결되지 않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개념이 흡수역량(Absorptive Capacity)입니다. 기업이 외부 지식을 자기화하고 내부 역량과 결합할 수 있는가가 경쟁력의 관건이 됩니다. 따라서 R&D 전략은 ‘자체 개발’과 ‘외부 협력’의 이분법이 아니라, 두 가지를 어떻게 최적화하고 균형 있게 활용하느냐에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최근 들어 R&D의 방식 자체가 크게 변화하고 있습니다. 첫째, AI 기반 R&D가 확산되고 있습니다. 인공지능은 신소재 탐색, 신약 후보 발굴, 회로 설계 최적화, 실험 데이터 분석 등 다양한 영역에서 연구 효율을 극대화하고 있습니다. 이는 ‘많이 투자하는 기업이 아니라, 데이터를 가장 잘 활용하는 기업’이 혁신을 주도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둘째, 대학과 스타트업과의 협력이 더욱 중요해지고 있습니다. 기업 혼자서는 모든 지식을 확보하기 어렵기 때문에, 개방형 혁신(Open Innovation)과 산학협력이 보편화되고 있습니다. 대기업은 스타트업의 민첩성과 대학의 창의성을 결합하여 혁신 속도를 높이고 있습니다.
셋째, 공공 R&D의 역할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반도체, 바이오, 에너지 같은 전략 산업에서는 정부의 기초연구 지원, 공동 연구소 운영, 규제 샌드박스 제공이 기업 R&D를 뒷받침합니다. 결국 기업의 혁신 역량은 공공·민간·학계의 삼각 협력 구조 속에서 극대화될 수 있습니다.
모든 논의를 종합하면, R&D는 단순히 비용 지출 항목이 아니라 기업이 미래를 설계하는 전략적 선택이라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얼마나 많이 쓰느냐보다 어떻게 쓰느냐, 어디에 쓰느냐, 누구와 함께 쓰느냐가 더 중요한 시대입니다. 효율성과 균형, 내부 역량과 외부 자원의 조화, 그리고 장기적 관점에서의 기초 연구와 단기적 응용 연구의 결합이 기업 경쟁력을 결정합니다.
R&D의 세계에는 ‘정답’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R&D를 통해 미래를 준비하지 않는 기업은 경쟁에서 뒤처질 수밖에 없다는 점입니다. 오늘의 선택이 내일의 기업가치를 결정한다는 사실, 그것이 바로 R&D와 기업 경쟁력의 본질적 연결고리입니다.
슘페터의 ‘1형-2형’ 구분은 혁신이 어디에서, 어떤 방식으로 발생하며 기업의 R&D를 어떻게 조직해야 하는지에 대한 매우 실천적인 시사점을 줍니다. 영어로는 각각 Schumpeter Mark I, Schumpeter Mark II라고 부르며, Mark I은 기업가적 실험이 주도하는 혁신 체제, Mark II는 대기업의 체계화된 R&D가 주도하는 혁신 체제를 뜻합니다. Mark I에서는 다수의 신규 진입자, 발명가, 소규모 스타트업이 다양한 아이디어를 빠르게 실험하며 산업의 경계를 밀어붙이는 경향이 강합니다. 실패율은 높지만 탐색 범위가 넓고, 지식이 널리 확산되며, 경쟁의 초점은 가격이 아니라 새로운 조합을 얼마나 빨리 만들어내느냐에 놓이기 쉽습니다. 반면 Mark II에서는 대기업이 독자적 연구소와 대규모 설비, 표준화된 개발 프로세스, 강한 지식 전유력과 보완적 자산을 기반으로 혁신을 ‘루틴화’하여 반복적으로 생산합니다. 탐색의 폭은 좁아지지만 개발 심도가 깊어지고, 공정 혁신과 품질 안정화, 대규모 상용화에서 강점을 보이는 체제입니다.
R&D 관점에서 보면 Mark I은 실험 설계, 신속한 피봇, 고객 개발, 오픈소스·오픈사이언스 활용 등에 초점이 맞춰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실험 단위가 작고 주기가 짧으며, 학습 속도가 의사결정의 핵심 지표가 됩니다. 기술과 시장에 대한 불확실성이 매우 클 때, 즉 성능 요구가 아직 고정되지 않았고 지배적 설계가 등장하지 않았을 때 Mark I 방식의 포트폴리오가 높은 기대값을 갖기 쉽습니다. 이 체제에서는 내부 R&D가 반드시 발명의 전부일 필요가 없으며, 외부 아이디어를 탐색·재조합하는 흡수역량이 결정적입니다. 대학·연구소·커뮤니티에서 생성되는 지식을 빠르게 해독하고, 내부 문제에 적용해 학습 증거를 축적하는 루틴을 갖춘 조직이 성과를 냅니다. 반대로 Mark II에서는 대규모 장비, 공정 노하우, 규제 대응, 글로벌 유통망 같은 보완적 자산이 R&D의 수익화를 좌우합니다. 동일한 특허라도 제조 스케일업, 신뢰성 검증, 인증·표준 획득, 서비스화 역량이 결여되면 경제적 성과로 연결되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Mark II 체제의 R&D는 단계별 기술성숙도(TRL), 품질·원가·리드타임 지표, 대량생산 이전 검증 체계, IP 조합과 전유 전략을 정교하게 관리하는 쪽으로 최적화됩니다.
기업의 생애주기와 산업의 기술수명주기(Technology Life Cycle)는 이 두 체제 사이의 적정 배합을 규정합니다. 산업 초·성장기에는 성능 프런티어가 자주 이동하고, 고객의 요구가 불안정하며, 새로운 설계 규칙이 경쟁하는 상황이므로 Mark I적 탐색이 필수적입니다. 이 시기에는 S커브의 하단에서 성능 개선률이 낮아 보이기 때문에 기존 강자가 신기술을 과소평가하기 쉽습니다. 반면 성숙기에는 지배적 설계가 형성되어 제품 구조와 인터페이스가 고정되고, 경쟁우위의 초점이 ‘더 좋은 것’에서 ‘더 싸고, 더 안정적인 것’으로 이동합니다. 여기서는 Mark II적 시스템 R&D, 공정 혁신, 공급망 최적화, 대규모 품질 데이터에 기반한 지속 개선이 가치를 창출합니다. 중요한 것은 두 체제가 배타적이지 않다는 점입니다. 성숙기 대기업이라도 차세대 곡선을 위한 소수의 Mark I형 실험을 지속해야 하며, 초기 스타트업이라도 상용화를 앞두고는 Mark II형 역량을 조기에 설계해야 합니다. 탐색과 활용의 동시추구(ambidexterity)는 결국 Mark I과 Mark II의 의도적 공존을 의미합니다.
자원배분 관점에서는 Mark I 체제에서 실험은 ‘실패가 빠를수록 좋은’ 옵션 성격을 갖습니다. 작은 베팅을 많이 배치하고, 유망 신호가 포착되면 스케일업 스위치를 켜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의사결정의 기준은 문서 완성도가 아니라 학습 증거와 고객 창출 지표이며, 게이트는 ‘무엇을 배웠는가’와 ‘불확실성이 얼마나 줄었는가’에 의해 통과 여부가 결정됩니다. Mark II에서는 반대로 공정·품질·신뢰성의 엄격한 게이트가 필수이며, 실패 비용이 크기 때문에 사전 검증과 시뮬레이션, 파일럿 운전, 시험생산 등 위험 저감 장치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이때 재무적으로 R&D를 실물옵션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유용합니다. 탐색 단계의 옵션 가치는 변동성과 남은 시간, 확장 가능성에 비례하며, 확산 단계의 의사결정은 누적 학습과 보완적 자산의 활용 능력에 따라 수익률이 달라집니다.
지식 전유와 보완적 자산은 두 체제의 수익 구조를 갈라놓습니다. Mark I 환경에서 지식은 빠르게 확산되며 모방이 쉽기 때문에 선점 이익은 크지만 지속 가능성이 약할 수 있습니다. 브랜드, 네트워크 효과, 데이터 자산, 개발자 생태계 같은 보완적 자산을 조기에 설계하지 않으면 후발 대기업이 상용화 국면에서 가치를 흡수하는 일이 잦습니다. Mark II에서는 특허 포트폴리오와 영업비밀, 리드타임, 표준화 참여, 규제·인허가 역량이 전유를 강화합니다. 바람직한 전략은 핵심 아키텍처를 보호하되 모듈 인터페이스와 보급 경로는 개방하여 외부 혁신을 끌어들이는 방식입니다. 이는 개방형 혁신의 논리와 맞닿아 있으며, 내부 R&D를 외부 지식과 데이터, 파트너의 보완적 자산과 연결하는 설계가 요구됩니다.
인적·조직적 역량에서도 차이가 분명합니다. Mark I은 다기능 소규모 팀, 빠른 실험 장비, 고객과의 짧은 피드백 루프, 실패 허용 문화가 핵심입니다. 보상과 평가 체계는 결과 그 자체보다 학습 기여와 실험의 속도를 중시해야 합니다. Mark II는 기술 표준화, 공정 관리, 안전·품질 규정 준수, 대규모 협업 체계가 중심이며, 데이터 기반의 지속개선과 지식의 암묵지→형식지 전환이 중요합니다. 두 체제를 한 조직에 공존시키려면 물리적·문화적 분리와 자원 배분의 이중 순환이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코어 사업부의 KPI와 보상 체계를 스케일과 효율에 맞추되, 신사업·리서치 조직은 별도 P&L과 의사결정 규칙, 다른 승진 기준을 적용하는 방식이 효과적입니다.
AI의 부상은 두 체제 모두를 재구성하고 있습니다. Mark I에서는 생성 모델과 대조학습, 자율 설계·탐색 도구가 아이디어 생성과 후보 축소를 가속하며, 실험 설계에 베이지안 최적화가 적용되어 학습 비용이 크게 줄어듭니다. 이로 인해 ‘적은 자원으로 넓은 탐색’이 가능해지며, 스타트업의 실험 경계가 넓어지는 효과가 발생합니다. Mark II에서는 공정 디지털 트윈, 예지보전, 신뢰성 시험의 시뮬레이션화, 품질 이상 탐지 같은 영역에서 AI가 스루풋을 높이고 변동성을 낮춥니다. 동시에 데이터 거버넌스, IP 귀속, 모델 재현성, 규제 준수 같은 새로운 관리 과제가 등장하며, R&D 파이프라인 전체의 MLOps·DataOps 역량이 핵심 인프라로 부상합니다. 결과적으로 AI는 Mark I의 탐색 효율과 Mark II의 활용 효율을 동시에 끌어올리지만, 데이터 품질과 편향 관리 없이는 오판을 체계화할 위험이 존재합니다.
정책 환경과 제도 역시 체제 선택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초기·탐색 중심의 생태계에는 창업·실험을 촉진하는 규제 샌드박스, 연구 인력 이동성, 공공 데이터 개방과 같은 제도가 중요합니다. 성숙·활용 중심의 산업에는 표준과 인증, 공급망 회복력, 대규모 인허가 역량, 안전·품질 규정의 예측 가능성이 필수입니다. 기업은 특정 국가의 제도 환경에 맞춰 Mark I·Mark II의 비중을 조정해야 하며, 해외 시장을 겨냥하는 경우 각 시장의 규제·표준 지형을 고려한 다경로 로드맵을 설계해야 합니다. 대학·연구기관·스타트업과의 협력은 두 체제에서 모두 유효하지만, Mark I에서는 공동 탐색과 오픈사이언스 연계가, Mark II에서는 공동 검증과 상용화 시험베드가 상대적으로 중요합니다.
마지막으로 성과 측정의 관점에서 두 체제는 서로 다른 계기판을 요구합니다. Mark I에서는 특허 건수나 매출 같은 후행 지표만으로 성과를 판단하면 탐색 투자가 과소평가됩니다. 학습 속도, 가설 검증률, 고객 문제-해결 적합도, 초기 코호트 잔존율 같은 선행 지표를 핵심 성과지표로 삼아야 합니다. Mark II에서는 신제품 매출 비중, 원가 곡선 하강, 공정 수율, 결함률, 납기 준수율, 규제 승인 리드타임 같은 지표가 우선합니다. 두 체제를 함께 운영할 때는 포트폴리오 단위에서 리스크·수익 균형을 조정하고, 정기적으로 탐색→확산 전환 후보를 리뷰하는 ‘스테이지드 스케일업’ 회의를 제도화하는 것이 효과적입니다.
Schumpeter Mark I은 entrepreneur-led experimentation, Mark II는 firm-led routinized R&D라는 두 가지 극을 제시하며, 현실의 승자는 두 체제를 상황에 맞게 혼합할 수 있는 조직입니다. 산업의 시간대와 기업의 역량, 정책 환경과 데이터 인프라를 교차 검토하여 탐색과 활용의 균형점을 설계하는 일이 곧 R&D 전략의 핵심입니다. 혁신은 하나의 방식으로 완결되지 않으며, Mark I의 과감한 실험으로 차세대 곡선을 찾고 Mark II의 정교한 시스템으로 그것을 대규모 가치로 전환하는 순환을 설계하는 기업이 지속적 경쟁우위를 확보합니다. 이는 R&D를 비용 항목이 아니라 불확실성 하에서의 선택권과 학습 파이프라인으로 재정의하는 관점이며, 오늘의 기술경영이 추구해야 할 실천적 결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