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탠리 휘트니의 작품들과 아모레퍼시픽 용산 사옥
현재 리만 머핀(LEHMANN MAUPIN) 갤러리에서는 게스트 큐레이터 엄태근이 미국과 한국에서 활동해 온 추상화가 네 작가(McArthur Binion, Stanley Whitney, 정상화, 윤형근)의 작품을 엮어 소개하는 <네모:Nemo>전이 열리고 있다. (2025년 6월 12일 ~ 8월 9일까지)
재즈를 좋아하는 나는 평소 스탠리 휘트니의 작업을 좋아했다. 마치 재즈 음악들이 메인 레퍼토리 안에서 각 연주자들의 즉흥 솔로들로 다양한 변주를 이루어내듯, 그의 작업은 일정한 규칙이 반복되는 구조적인 틀(그리드) 안에 서로 다른 색채들이 각자 자신을 뽐내면서도 전체적으로 조화로운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이는 건축물의 입면과 평면에서도 흔하게 발견할 수 있는 구성방식인데, 그의 작품을 보며 자주 떠오른 건축물이 바로 David Chipperfield Architects(DCA)에서 설계한 아모레퍼시픽 용산 사옥이었다.
휘트니는 캔버스를 수직과 수평의 격자(grid)로 나누고 각 칸을 다양한 색채의 블록으로 채운다. 이 격자(grid)는 엄격한 구조적인 틀을 구성하지만, 각 블록의 색채와 크기, 붓터치는 즉흥적으로 변주되어 전체적으로 질서와 자유가 공존하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이렇게 구성된 각각의 블록들은 캔버스 위에서 관계를 맺으며 전체적으로 통일된 인상을 준다.
아모레퍼시픽 용산 사옥의 평면은 휘트니의 격자(grid) 보다 더욱 엄격하게 구성되어 있다. 바닥의 경우 90m X 90m의 사각형 틀 안에 8.1m 간격으로 배치된 기둥, 또 이 8.1m 간격을 6 등분하는 정사각형 포천석 마감으로 구성되어 마치 모눈종이를 보는 듯 끊임없는 반복과 대칭을 이루고 있다. 하지만 지상 1층 평면도를 보면, 이러한 규칙 속에서 콘크리트와 유리 벽체를 활용하여 건물의 기능적인 영역을 구분하기도, 유기적으로 연결하기도 한다. 두꺼운 까만 선(콘크리트)으로 둘러싸인 공간에는 회사 직원들이 상부의 업무공간으로 올라갈 수 있는 엘리베이터와 계단들이, 얇은 선(유리)으로 둘러싸인 공간에는 직원과 시민 모두에게 개방된 로비와 상업시설들이 배치되어 있다. 이렇게 도면에서 보이는 엄격한 틀 안에서의 공간 배치는 휘트니 회화 작업의 구성이 주는 느낌과 상당히 닮아있다.
휘트니는 "공간은 색 안에 있다"라고 말한다. 느슨한 격자(grid) 속 각 칸에 색채 블록들을 즉흥적으로 쌓아 올리며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색의 경계와 겹침, 번짐 등의 효과를 통해 캔버스에 전체적으로 공간적인 깊이와 리듬을 형성한다. 아래의 'Yellow Changing'을 보고 있으면 아모레퍼시픽 용산 사옥의 야경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크게 네 덩어리를 쌓아 올린 듯한 건물의 구성과 사이사이에 크게 비워져 있는 공간들이 만들어내는 깊이감. 그리고 실내조명이 켜있는 영역과 그렇지 않은 영역이 무작위로 만들어내는 빛의 패턴과 색감은 마치 휘트니의 작업이 3차원적으로 재구성된 느낌을 준다.
면이 아닌 선으로 구성된 휘트니의 작업은 자로 그은 듯 반듯하지 않고 그 색도 제각각이다. 이는 마치 각기 다른 사람들이 춤을 추는 듯한 인상을 주며, 재즈 연주에서 연주자들이 서로의 연주에 반응하며 즉흥적으로 곡을 이어가는 방식과도 유사하여 머릿속에 신나는 재즈 음악이 떠오르기도 한다.
아모레퍼시픽 용산 사옥의 입면도 이와 비슷하게 선형의 루버들로 구성되어 있다. 가까이서 보면 루버들의 간격이 일정하지 않은데, 이는 각 실내 공간에 햇빛을 적절하게 차단하기 위하여 철저하게 계산된 불규칙한 배열이다. 하지만 이러한 배열은 동시에 단순한 건축물 형태에 자연스럽게 시각적인 리듬감을 부여한다. 그리고 스탠리의 작품들과 다르게 루버는 한 가지 색(흰색)으로만 만들어졌다. 하지만 이는 오히려 외부에서 건축물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위치와 시간, 빛의 조건에 따라 루버의 색상이 미세하게 변화하며 역동성을 만들어낸다.
휘트니는 색채의 배열과 경계로, 아모레퍼시픽 용산 사옥은 반복적 구조와 재료, 빛을 활용하여 각각 공간감과 리듬을 만들어낸다. 이렇게 휘트니의 작품들과 DCA의 아모레퍼시픽 용산 사옥은 서로 다른 예술 분야임에도 불구하고 엄격한 구조인 격자(grid) 위에서 자유로운 변주와 리듬, 공간감을 창조한다는 유사성을 보여주는 것 같다. 마지막으로 스탠리 휘트니가 작업실에서 반복해서 자주 듣는다는 앨범을 하나 추천한다. 함께 들으시며 그의 작품들도 감상해 보시고, 아모레퍼시픽 용산 사옥도 들러보시기 바란다.
https://www.youtube.com/watch?v=SbCt-iXIXlQ